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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Jul 26. 2019

Raw, Raw, RAW.

<RAW>(2017)



<로우(RAW)>(2017, 감독: 줄리아 듀콜뉴)

Feat. <슈퍼노바>(2017), <옥자>(2017), <스토커>(2013)

* <RAW>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RAW>(2017) 포스터.


대부분의 장면이 보기 괴롭다. 의도적이다. 허나 관객을 괴롭히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예외적인’ 상황과 인물들로 자극적인 화면을 눈에 들이미는 데에는 까닭이 있다. 일관성 있는 불편함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어쩐지 1초도 놓치면 안 될 것 같아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눈을 부릅떴다. 영화관을 나와서는 이 ‘끔찍한’ 기분을 그냥 잊고 싶어 하는 내 일부를 다잡으며, 이야기가 남긴 흔적을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지 곱씹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날것의raw 감정을 마주해야 해야 한다는 것을. 감독이 말하려는 것과 내가 느낀 것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더라도, 설명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RAW>(2017)


쥐스틴은 수의학과에 입학 한다. 부모가 다녔던, 언니가 다니고 있는 바로 그 학교, 그 학과다. 아무리 가족과 가까운 인물이라고 해도, 특이하다. 부모와 언니가 겪은 경로를 그대로 경험한다는 설정은 복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쥐스틴은 일종의 ‘유전적 이상성욕자’다. 흥분하면 인간의 살을 먹고, 인간의 살을 먹으며 흥분하는 여성이다. 엄마는 자신과 딸들의 욕망을 억누르려고 애쓰고, 언니는 욕망을 알게 된 후 적극적으로 분출한다. 작품은 쥐스틴이 욕망을 깨닫고 받아들이고 시도해보고 통제하며 ‘앓는’ 과정을 따라간다.


드러난 폭력은 인육을 먹는 특이한 행위다. 허나 충격을 걷어내고 들여다보면, 작품의 배경인 수의학과에서 발생했던 온갖 ‘평범한’ 폭력이 떠오른다. 여성과 성적 소수자를 ‘낮은 존재’로 취급하고, 군대식 복종을 요구한다. 신입생들을 겁주고, 소지품을 내던지고, 여성을 배제한 가사의 노래를 가르치고, 여학생들의 옷을 통제하며 성적으로 대상화 하고, 성관계를 강요한다. 피를 뒤집어쓴 쥐스틴은 미소 짓지만, 어쩌면 그것은 ‘즐겨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에 의한 착각, 상황에 몰려 나오는 반사적 반응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RAW>(2017)


날고기를 먹은 후 일어난 쥐스틴의 피부 발진을, 전반적인 폭력에 대한 거부 반응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렉세이도 마찬가지다. 겪은 과정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쥐스틴과 같은 연고를 가지고 있음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학교(밖의 세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에서 거의 가장 취약한, 여성/채식주의자/신입생(이 외에 인종, 성 지향성, 외모 등의 요인에 의해 촘촘한 차별이 발생한다.)의 위치에 있는 자매가 폭력에 적응한 방식은, 인육 섭취- 가부장제 사회의 포식자predator인 남성의 살을 뜯어먹음으로써 그 위 최종 포식자의 자리에 올라서는 것이다. 처음 맛본 살은 언니의 잘린 손가락이었지만, 이후 쥐스틴이 물어뜯는 살은 성욕을 느끼는 대상, 남성들의 것이다. 남성중심적 시선에 의해 ‘몸’으로 소비되곤 하는 젊은 여성이, 남성의 몸을 먹는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다.  


파란 페인트를 뒤집어 쓴 쥐스틴은, 강압적인 상황에서 성관계를 시도하던 남자의 입술을 물어뜯는다. 싫어서 한 저항은 아니다, 오히려 욕망을 느껴 한 행동이다. 그러나 애초에, 그와, 문 밖의 선배들에게, 신입생의 의사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쥐스틴이 원했다고 해서 그들의 행동이 집단적 성폭력이라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작품은 물어뜯는 장면은 생략하고 남자의 비명과 뜯겨나간 입술로 상황을 드러낸다. 두 사람을 몰아넣은 채 문을 잠그고 재미있어하던 가해자들의 표정이 비명 소리와 함께 바뀔 때는, 통쾌함마저 든다. 사건 이후 물로 페인트를 씻어내며, 쥐스틴은 이에 껴 있던 입술 조각을 꺼내 천천히 맛보듯 먹는다. (<스토커>(2013)에서 인디아가 샤워하는 장면이 연상된다.) 쥐스틴에게 사람의 살은, 식욕보다 성욕과 연결된다. 생존을 위해 먹는 음식이 아니라 조절하기 힘든 욕구의 대상이다.


<RAW>(2017)


하지만 쥐스틴이 고기를 먹는 모습은, 그 이상의 무언가를 전달한다. 대부분 보기 힘든 장면들이다. 카메라는 살을 뜯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담는다. 피와 살, 드러난 뼈, 그것들을 깨물고 씹는 시뻘건 입과 얼굴을 집요하게 클로즈업한다. 징그럽고 무섭다.

여기서 인간이 행사하는 또 다른 폭력을 떠올리게 된다. ‘육식’이다. 쥐스틴의 가족이 채식을 한다는 설정 때문은 아니다. 이들의 채식은 인육에 대한 갈망을 억누르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 오히려 주목할 것은, 고기를 먹지 않는 행위가 아니라 먹는 행위다. 이를 담은 장면들은 단순히 ‘인육을 먹는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관객은 형태가 있는 신체 부위를 날로 뜯어먹는 모습을 목격함으로써, ‘누군가 내 살을 음식으로 여기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초반 신입생들이 손과 발로 기어 계단을 오르는 장면이나, 알렉세이가 ‘사냥’을 위해 맹수처럼 점프하는 장면은, 인간과 다른 동물의 경계를 흐린다. 이 ‘육식’과, ‘보통’ 인간의 육식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가, 하는 고민이 피부를 타고 기어오른다.


<RAW>(2017)


같은 해 개봉한, 인간의 ‘육식문화’에 문제를 제기하는 다른 픽션 영화들과 대강 비교해본다.

<슈퍼노바(Extra Terrerstres)>(2017)가 직설적이고 직접적으로 주제를 풀어놓은 후에 영화적이고 이상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옥자>(2017)가 SF적 자극을 이용해 흥미를 끈 후 분명하긴 하지만 거리감이 들어 살짝 덜 불편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낸다면, <로우>는 충격적인 설정과 묘사를 통해 감정적인 동요를 일으킨다. ‘음식으로 길러지는’ 동물들의 실태를 담지는 않으나, 오히려 그 동물들과의 심리적 거리감을 좁힌다. 더 나아가면 극단적인 역지사지라고 할 수도 있겠다.

<슈퍼노바>와 <옥자>는 동물을 사랑하는 주인공을 세우고, 그와 대립하는 인간과 시스템을 등장시켜, 공장식 축산의 폭력성과 대안을 그리는 데에 초점을 둔다. 반면 <로우>의 대립과 갈등은 내면과 외면의 것이 얽혀 복잡하며, 던지는 고민은 보다 근본적이다. ‘다른 동물의 살을 먹는다는 것’ 자체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물론 앞의 두 작품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욕망과 마주하는 주인공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RAW>(2017)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전개나 대사에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다. 그와 연결해, ‘어떤 이미지를 어떻게 담았는가’도 눈여겨봐야 한다. <로우>에서 눈에 띄었던 것은 앞에서 언급한 육식 장면을 포함해, ‘인간의 몸’을 찍는 방식이었다. 여성/주인공/쥐스틴의 몸은 어떤 대상으로 소비되기를 거부한다. ‘아름답지’ 않고, ‘있어선 안 될 것’으로 뒤덮여 있기도 하며, 있는 그대로(raw) 마음껏 개인적이다.  


쥐스틴은 종종 속옷만 입은 상태로 등장하는데, 성적인 뉘앙스는 없다. 카메라는 고기를 처음 먹고 발진이 일어난 쥐스틴의 피부와, 피가 날 때까지 긁어대는 손, 이후 의사가 상처에서 껍질을 벗겨내는 모습까지 직접적으로 찍는다. 여성 의사가 들려주는 ‘뚱뚱한’ 학생에 대한 일화는 괜한 흥밋거리가 아니다. 왁싱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쥐스틴의 다리와 털을 있는 그대로 찍는다. 반강제로 쥐스틴의 털을 뜯어내던 알렉세이는 손가락이 잘리고, 그 잘린 손가락을 쥐스틴에게 뜯어 먹힌다. 대사와 상황, 이미지를 통해 여성의 몸에 대한 ‘당연한’ 통제를 이야기하고, 때로는 응징까지도 하는 것이다.


<RAW>(2017)


반면 남성의 몸(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드리안의 것인데)은 쥐스틴의 욕망을 따라 아름답게 대상화 된다. 윗옷을 벗은 채 운동하는 몸을 쥐스틴은 뚫어져라 응시한다. 그 몸의 주인인 아드리안이 ‘전형적인 가부장적 남성’이 아니라는 점이 마음에 걸리는데, 때문에 쥐스틴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는, 그녀가 처음으로 욕망하는, 그녀를 욕망하지 않으면서도 욕망하는, 통제하고 어쩌면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남성이자, 유일한 친구였다.


쥐스틴은 뜯어 먹힌 아드리안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슬퍼한다. 이 무고한 희생자는, 섹스와 죽음의 경험을 ‘선사해’ 쥐스틴의 ‘성장을 돕는다’. 욕망을 바라보고 컨트롤 할 계기를 마련해 준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성장을 위해 희생된다,는 해석을 현실로 가져오면 폭력적이고 잔인하지만, 픽션 캐릭터로 한정하면 그렇지만도 않다. 특히 이제까지 나온 남성 중심적 영화들에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남성 주인공 캐릭터를 쌓느라 죽고 다치고 당했는가,를 떠올리면 딱히 드문 설정도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드리안이라는 인간과 함께 잃어버린 쥐스틴과의 관계가 엄청 안타까워서 눈물이 났지만.  


<RAW>(2017)


쥐스틴은 멍하게 널브러져 있는 알렉세이를 아드리안의 피가 묻은 봉으로 겨누다, 결국 던지고 언니를 일으켜 씻긴다. 알렉세이는 쥐스틴보다 먼저 폭력적인 문화를 겪은 피해자이자, 그것을 재생산 하는 가해자다. 살아남은 그녀는 동생을 보호하는 대신 똑같은 폭력을 행사하며 본인처럼 될 것을 강요했다. 쥐스틴은 스스로를 통제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기꺼이 그 위치를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알렉세이와 다르다. 그렇게 쥐스틴은 인육을 공유한 언니에게서 벗어나, 죽음의 무게를 안고 ‘성장’ 한다.


허나 미래는 불투명하다. “너희는 해결책을 찾을 거야.” 라는 마지막 아빠의 대사는 딱히 희망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떨며 눈물을 흘리는 쥐스틴이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RAW>(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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