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다른 꽃을 보며 피지 않는다
왜 이렇게, 다들 글을 잘 쓰는 걸까.
글을 좀 쓴다고 우쭐우쭐했던 나의 어린 시절은 참 앙증맞고 귀여웠다.
뭐 하나 끄적거리기만 해도 어른들은 신기하다며 박수를 쳐줬고,
"잘 쓴다, 잘 쓴다" 하니 나는 정말 내가 잘 쓰는 줄 알고 의심조차 없이 행복해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렸고, 좋았다.
세월은 그렇게 나를 키웠고, 나는 쭉쭉 자라 누군가의 희망이 될 줄 알았는데
좌절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나보다 잘 쓰는 아이들 틈에서
찢기고, 부서지며, 현실이란 이름을 배워갔다.
그렇게 사춘기에 접어들었고, 삶의 대한 불안을 작가에 대한 열망으로 채워갔다.
시험기간이고 뭐고 공부는 뒷전으로 미뤄두고
방에 틀어박혀 소설도 쓰고, 대본도 쓰고, 시도 쓰고 내가 쓸 수 있는 건 다 썼던 거 같다.
한 번 펜을 잡으면 노트 열 장쯤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줄줄줄 썼던 열정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내 인생을 통틀어 그때만큼 진지했고, 그때만큼 심각했던 적도 없었으리라.
도대체 무슨 글을 썼는지는 기억도 안 나지만, 그때 그 글들을 지금 가지고 있었다면
얼마나 추억이 됐을까. 참 아쉽다.
고등학교 2학년 때다.
학교 대표로 대학교에서 열리는 글짓기 대회에 나가게 됐고,
장원을 하면 특별전형으로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강당엔 각 학교 대표들이 빼곡히 앉아 있었고,
나는 그제야 내가 우물 안 개구리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실히 깨달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고 있었구나....
그들의 글을 본 적도 없는데 괜히 주눅이 들었다.
그날의 글감은 '자동판매기'.
긴장을 너무 많이 한 탓인지 '자동판매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도대체 저게 외계어인가, 외국어인가...
그렇게 멍하니 다섯 글자만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펜을 들었다.
자동판매기....
자동판매기....
아, 글이 막힌다는 게 이런 거구나.
머리가 텅 빈다는 게 이런 거구나..
운문을 신청할걸 괜히 산문을 골라서는
후회와 함께 내 능력을 한탄했다.
결국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글을 겨우 제출했다.
학교 대표로 왔는데, 선생님과 친구들을 어떻게 보지?
너무 창피하고 속상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아 꾹 참고 있었는데, 옆자리에 앉은 아이가 조용히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턱 하고 막혔던 숨이, 헉하고 새어 나왔다.
살 것 같았다. 그 아이의 손이 너무 따뜻해서
얼어붙은 내 몸과 마음을 한 번에 스르르 녹이는 것 같았다.
시나브로...
심사위원들이 장원을 발표했다.
어떤 아이일까 싶어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는데
장원같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원같이 생긴 아이는 어떤 아이인지 정의도 모르겠고, 기억도 안 나지만
그 아이의 눈빛은 '글'로 빛나고 있었던 거 같다.
나보다 한 학년 아래, 다른 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상을 받고, 시낭송을 하는데 첫 구절을 듣자마자
그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나는 글이라는 걸 쓰고 있었던가....
천상계에서 오면 저렇게 쓸 수 있을까...
나는 그 아이가 쓴 시를 듣고 마음이 요동쳤다.
그 아이의 시는 내 몸에 박혀 버렸고,
나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래서 비참하지도 않았다는 것.
마음을 다해 온 힘을 다해 환호를 하며 그의 승리에 박수를 쳤다.
순간,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갑자기 속이 후련해졌다.
몸과 마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선생님께 이 말을 하고, "글을 그만 쓸까요?"라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선생님께서
운동을 한다고 누구나가 국가대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세상엔 자기가 좋아하는 운동으로 꿈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노벨문학상을 타지 못한다고 좌절하면 어느 누가 글을 쓰겠냐고.
서점에 널린 그 수많은 책들의 가치를 모르겠냐고
나만의 글을 쓰면 언젠가 나만의 책이 나온다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다시는 쓸 수 없을 것 같은 공포에서
쓸 수 있는 명분을 얻어,
나만의 글을 끝까지 쓰겠노라고 결심했다.
'꽃은 다른 꽃을 보며 피지 않는다.
그저 제철이 되면 피어날 뿐이다. -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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