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이 머무르는 곳 : 피렌체

by 레슬리

2016년 9월

베로나를 출발한 열차가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에 도착했다. 날씨는 맑았고 따뜻한 가을 햇살이 내리쬐던 그런 날이었다. 기차에서 내려 역을 빠져나오자마자 눈앞에 펼쳐지는 도시 풍경이 따스했던 기억이 있다. 날씨가 좋았던 탓인지 그토록 오고 싶어 했던 곳에 오게 된 기분 탓인지 피렌체의 첫인상은 따뜻함 그 자체였다.

우선 짐을 풀어야 하기에 기차역에서 미리 예약해 놓은 숙소까지 거리가 멀지 않아서 걸어가기로 한다. 울퉁불퉁한 돌바닥 위로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피렌체 골목에 들어섰다. 한 달 여행 계획으로 짐을 가져온 터라 캐리어가 무거웠지만 영화에서만 보아오던 그 거리에 들어서니 캐리어의 무거움쯤은 큰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한 블록을 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유럽의 오래된 도시는 대부분의 인도와 차도가 울퉁불퉁한 돌길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피렌체도 그런 도시였고 캐리어 끄는 게 쉽지가 않아서 평소보다도 힘이 더 들어가 괜히 걸었나 싶을 쯤에 다행히도 숙소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런데 숙소에 도착하니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바로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이라는 것이었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호텔이 아닌 에어비엔비 같은 숙소에서 흔하게 마주치게 되는 문제인데 짐도 무겁고 이미 집을 떠나온 지 수일이 흐른 상태라 지치기도 했어서 짐을 어떻게 들고 올라가야 되나 막막했었는데 그 순간 위에서 어떤 보자기 같은 것이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이게 뭔지 상황 파악이 채 되기도 전에 집주인이 반갑게 내려오더니 보자기처럼 생긴 천 위에 캐리어를 싸고 다시 위로 올라가서 보자기에 연결된 끈을 당기니 보자기에 싸인 캐리어가 둥실 떠서 숙소가 있는 층으로 옮겨져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엘리베이터가 없으니 짐을 옮길 수 있는 방법을 숙소 자체에서 수동으로 만든 것 같았는데, 둥실 떠가는 캐리어를 보며 신기함과 양손이 가벼워져 신난 발걸음으로 숙소로 올라갔다. 방 안내를 받고 피렌체에 대해 가볍게 소개를 해주는 집주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시 숨을 돌리며 피렌체에서의 여행을 시작해본다.

숙소에 짐을 풀어놓고 얼른 다시 거리로 나와 본다. 두오모가 바로 보이는 곳에 숙소를 정한 터라 밖으로 나오자마자 두오모 앞으로 바로 걸어가 본다. 두오모를 둘러싸고 수많은 관광객들과 바이올린등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들이 한데 섞여 부산하지만 어떤 알 수 없는 정돈된 분위기가 펼쳐진다. 또 그 주위엔 노천카페와 식당들이 둘러싼 모습이 보인다. 순간 영화 속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었다. 영화 속에서 보던 그곳, 그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꼭 한 번은 와보고 싶었던 곳. 그곳에 지금 내가 서 있다.

그렇게 도착하자마자 두오모를 둘러보고 해가 질쯤이 되어 피렌체 전경을 볼 수 있는 미켈란젤로 언덕을 찾아가 본다. 언덕에 오르니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한 하늘 아래 조용히 불을 밝히기 시작하는 고요한 도시가 눈에 들어온다. 조금은 뜨거웠던 낮의 태양이 조용히 불어오는 바람에 조금씩 물어가는 시간, 그렇게 서서히 도시에 어둠이 내려온다.

눈앞에 펼쳐진 피렌체의 풍경을 보며 가만히 이어폰을 꺼내 음악을 틀어본다.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의 OST.

이 영화를 보면서 피렌체를 꿈꾸었었다. 주인공이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피렌체의 골목골목을 눈에 담으며 그곳에 언젠가 갈 수 있기를 꿈꿨던 날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곳에서 그 영화의 음악을 듣고 있다. 귀에 들려오는 음악이 나를 영화 속으로 들여다 놓는다. 눈앞에 고요한 어둠이 조금씩 내려앉은 도시가 펼쳐지고 때마침 선선한 바람도 불어온다. 가만히 음악을 들으며 이 아름다운 도시를 보고 있자니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이때 처음으로 알았다. 아름다움에도 눈물이 날 수 있다는 것을. 오랫동안 꿈꾸던 곳에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도착한 날부터 피렌체에 머무는 내내 이 영화 음악은 내 여행의 배경음악이 되어주었다. 영화 속에서 두 연인이 같이 오고 싶었했던 두오모에 올랐을 때도, 혼자 골목 여기저기를 다니며 피렌체란 도시를 가득 마음에 담고 싶었던 발걸음에도 음악이 가득 채워졌다.

도시 곳곳을 걸어 다니며 참 열심히도 이 도시를 눈으로 기억하려고 했었다. 그때마다 이 피렌체라는 도시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인물들이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르네상스 시대 때 이 도시에 큰 영향력을 주었던 메디치 가문이, 또 그와 함께 이곳에서 예술을 꽃피웠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또 미켈란젤로가 도시 곳곳에 숨 쉬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느 쪽으로 발걸음으로 옮겨도 예술적 풍요로움이 주는 어떠한 여유가 느껴져서 이곳에 머무는 내내 알 수 없는 따뜻함을 계속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지금도 가만히 눈을 감으면 피렌체의 그 아름다움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그리 오랜 시간 머물지는 못했지만 오래된 도시가 주는 아름다움이 어떤 건지 느꼈던 그곳. 너무나 사랑하는 음악과 함께했던 그곳.

가끔씩 조용히 햇살이 내리쬐던 그 도시가 너무 그립다. 이 그리움이 쌓여 다시 그 도시를 꿈꾸다 보면 언젠가 다시 찾을 수 있는 날이 또 올 수 있지 않을까.



https://youtu.be/u1ssxLaCqDE?si=h-Rag5V4tuQAa_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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