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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 Bori Jun 02. 2024

생산과 효율이 최고라고 믿었던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읽다 보면 뇌가 간질간질 해지는 책이 있다. 동족을 만난 반가움에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온전히 이해하고 싶은데, 동기화가 될 듯 말 듯 약 오르는 느낌. 이 책으로 두 번이나 독서모임을 참여했던 배경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독서모임에서 만난 이들 중에서, 나처럼 저자의 생각을 반가워하거나 그에 동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제목에서 기대한 것과 내용이 달라서 실망했다던지, 이해하기 어려웠다던지, 책을 다 읽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이 뭔지 여전히 모르겠다는 의견이 많았다. 많은 사람이 크게 공감하지 못하는 책이 왜 나에게는 이렇게나 의미가 있었을까.


타이밍이 좋아서? (앞만 보며 달려오다가 난생처음 무계획 퇴사를 결심한 때였다)

‘공백을 허락받지 못한 자들을 위한 책’이라는 서문에 마음의 빗장이 풀려서? (서문을 쓴 김보라 감독을 좋아한다)

자연을 좋아하는 취향이 같아서?

관심경제나 자본주의, 퍼스널브랜딩 등을 비판해서? (읽으며 통쾌했다)

바쁘게 무언가를 하는 게 최선이 아니라고 해서? (‘현대인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분주하게 활동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한다’는 에리히 프롬의 말에 큰 깨우침을 얻은 바 있다)


2023년 봄, 소득도 계획도 없이 비생산적인 시간을 보낼 무렵 이 책을 추천받았다. 스스로에게 휴식을 허락했던 때인 만큼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하는지 공감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어떻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지는 본질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잘 모르겠는 채로 그냥 작가가 하는 대로 따라 해 봤다. 자연을 관찰하고, 새소리도 듣고, 산책도 하고, 명상도 하면서. 취향과 잘 맞아서인지 꾸준히 자연의 변화를 체감하며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이 책은 마음속 깊은 곳에 씨앗처럼 내려앉았다.



다시 봄이 되어 1년 전 이맘때를 상기시켜 보니 이 책이 함께 떠올랐다. 볕이 좋은 어느 주말 다시 이 책을 후루룩 읽었는데 신기하게도 이제야 비로소 또렷하게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은 느낌이었다. 하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도대체 뭐가 좋은데?’ 또 하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데?’

오래도록 마음에 품고 있던 마음속 씨앗에 새싹이 돋아나 실체가 드러난 느낌이랄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가만히 누워있는 게 아니다.
애매모호한 생각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 머무는 걸 뜻한다.
저자는 현재라는 시간과 공간을 제대로 인식하는 감각을 통해 진짜 세계에 접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짜 세계에 접속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


처음 책을 읽었을 땐, 문자 그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진짜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산책을 하면서 오디오북을 듣고, 회의를 하면서 다음에 해야 할 일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이 존재하고 있는 현재에 오롯이 존재하는 것.

현존하고자 노력했던 1년이 지나고 다시 책을 읽은 지금, 진짜 세계란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세계에 접속한다는 건, '본질을 계속 상기시키는 일'이다. 생산을 위한 생산,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린 모든 것에 대해 본래의 의도와 목적을 자주 떠올려보는 것. 컨베이어 벨트 위로 계속 밀려오는 과업을 처리하다 보면 어느새 잊는다. '왜 이걸 하고 있더라?' 시간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면서 더 좋은 방법이 눈앞에 있는대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필요가 없어졌는데도 관성처럼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 것 자체에 의미부여를 하고 있었던 적, 있지 않나?


이 개념은 비슷한 시기에 읽었던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을 통해 더 쉽게 이해된다. 이 책은 영화감독 지망생들을 인터뷰해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덕질과 고민의 시간, 멍타임,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알바를 하는 시간까지 비효율적이게 보이는 시간이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보여준다. 생산적인 작업을 위해서는 비생산적인 시간이 필수적이라는 거다.


결과를 내기까지 투입되는 노력은 그동안 평가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왔다. 각자도생 하고 있는 지망생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을 재평가한다. ⓒ북저널리즘



비효율과 모호함이 더 큰 생산성과 효율을 만든다.


당장 성과나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 듯 보이지만, 그런 애매모호한 생각과 시간이 쌓였을 때 폭발적인 생산성으로 연결된다. 끊임없이 생산성을 외치는 사회에서 우리는 빠른 길을 찾고자 혈안이 되어 있지만, 세상은 점점 예측하기 힘들고 정답이 통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저마다의 길을 만들어가는 방법이 필요하다. 그를 위한 시행착오는 비효율과 모호함에서 나온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나와 세상에 호기심을 갖는 것, 순수하게 궁금한 것들에 대해 알아보고 탐구하는 것, 비생산적이고 무의미해 보이는 이 시간이 생산적인 과정의 일부라고 믿는 것이 아닐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없다.


현재를 감각하며 본질을 자주 상기하기 위해선 의지와 자제력이 필요하다. 흘러가는 대로 두는 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방법은 이렇다.

사색하는 동시에 참여하고, 떠나는 동시에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언제나 다시 돌아오는’ 하이브리드적 대응이 필요하다.

‘한 발짝 떨어지기’를 통해 이 세계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외부자의 관점을 갖아야 한다.

순수한 관심과 지속적인 만남이 필요하다.



지금 내가 서있는 땅에서 한 발짝 떨어져 외부자적 관점을 갖기


저자는 자신이 속한 사회를 거부하고 제3의 공간으로 은신한 개인, 조직 등의 다양한 예를 보여준다. 이런 거부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은 '스위치를 끌 권력'과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주장도 소개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현실을 떠나 관심을 꺼버리는 선택을 할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관심을 확대하고 증식하는 능력과 관심을 더욱 예리하게 갈고닦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 자신이 인지하는 것을 제삼자처럼 관찰하고 분석하는 메타인지를 나에게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 적용해 보는 거다.



그저 인생을 경험하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큰 삶의 목적이다.


서문에 나오는 “못생긴 나무의 쓸모”는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인간을 나무라 생각해 보자. 내 경우 좋은 목재로 선택되는 것이 나의 쓸모이자 존재 목적이라고 생각했고, 벌목꾼에게 선택받을 수 있는 기준에 맞춰 성장하고자 노력했다. (못생긴 나무를 은근히 무시하면서)

하지만 오래도록 살아남은 나무는 옹이가 많은 못생긴 나무였다. 좋은 목재감이라는 쓸모를 가지지 못해 500년을 살아남은 것이다. 하지만, 과연 나무에게 살아남는 것보다 더 중요한 쓸모가 있을까? 그뿐만 아니라 500년 동안 자란 나무는 어마어마가 크고 가지도 많아서 쉴 곳을 찾는 수많은 동물들을 돌보고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기회를 줬다. 자신을 보호하는 데만 그치지 않았다 뜻.

최근 몇 년간 가장 많이 한 질문이 있다면 이 두 가지일 것이다. 나는 과연 왜 사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런데 못생긴 나무의 이야기를 들으며 늘 고민하던 질문에 새로운 조건을 붙이게 되었다. ‘나를 둘러싼 관계와 환경 속에서’ 왜 살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말이다. 산책길을 걸으며 수없이 고민했다.



식후땡 산책을 즐기는 한량 같은 일상은 삶의 모습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관심사가 넓어지고 호기심이 많아졌다. 당장 성과를 낼 수 있는, 생산성이 있고 효율성이 높은 일이 아니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던 일들에 기꺼이 시간을 들였다. 드라마를 보고 책을 읽다가 궁금해지면 멈춰서 찾고, 또 가지치기를 해서 찾는다. 조선의 역사, 미국의 역사, 과학, 우주, 뇌 등등 산발적으로 파고들다 보면, 흩어진 관심들이 어디에선가 만나서 꿰어진다. 그 순간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비로소 앎과 배움의 재미를 깨닫게 되었다.


이해심이 넓어졌다. 놀이터에서 돌고래 초음파 소리를 내며 싸우고 우는 아이들의 소음에도 너그러워지고, 타인에게 들이대던 엄격한 잣대도 ‘그럴 수 있지’로 바뀌었다. 내가 아는 걸 이들은 왜 모를까 무시하거나 얕잡아 보지 않게 되었다. 머리로만 가능하던 것들이 마음으로 가능해졌다.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관심이 생겼다. 어떻게 하면 ‘내가’ 잘 살 수 있을까 고민했었는데, 이제는 공동체가 발전하는 방향에 기여하고 싶다는 새로운 목표를 갖게 되었다. 그동안 충분히 나를 돌보고 채웠는지, 안으로 향하던 안테나를 외부로 돌려세울 수 있었다.


이런 변화의 시작은 이 책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1년 전 뭔지는 명확히 모르겠다는 애매모호한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품고 지내다 보니 시야의 각도가 넓어졌다. 그리고 이런 비생산적이고 모호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떤 잠재력이 있는지 믿게 되었다.


많은 이가 눈앞의 효율과 생산성을 최고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며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려 살아간다. 나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행동하는 순간들을 마주한다. 길들여진 시간이 얼만데 당연할 수밖에. 하지만 비생산적인 시간의 잠재력을 한 번만 경험해 본다면 모두가 느낄 것이다. 진짜 목적, 폭발적인 생산성, 큰 변화는 모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 보이는 시간에서 만들어진다는 걸.




김보라 감독의 서문과 작가의 ‘들어가며’에 이 책의 요약본이 있다. 이를 보면서 강한 반발감이 든다면 아직 이 책과의 타이밍이 아닌 것이고, 조금이라도 공감되고 공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시차를 두고 꼭 읽어보기를 추천하고 싶다.




받아들임의 최고봉은 나무이지 않을까


나는 나무가, 들꽃이, 잡초가 좋다. 자신이 선택하지 못한 채 뿌려진 땅에 터를 잡고, 척박하면 척박한 대로 최선을 다해 싹을 틔우고 살아가는 모습을 닮고 싶다. 앞으로는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주고, 그늘도 만들어주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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