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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집 K Mar 13. 2024

다음 날 약을 사다놨더라고

무응답을 응답으로 만든 배려

나는 회사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크게 관심이 없다. 특히 사내 연애를 알아채는데는 늘 그 소문의 가장 끝에 있었고, 사내 연애든 뭐든 좋아하는 사람들 끼리 만나서 연애한다는데 축하해야지 뭐가 어쩌구 저쩌구 하나 하는 편이었다. 그렇게 눈치가 없어서인지, 내 동기 Y, 심지어 같은 팀 동기의 사내 연애는 같은 회사를 다니는 동안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냥 그 남자 선배가 내 동기한테 관심이 많은 줄로만 알았지 뭐….


이 둘의 결혼 소식은 다른 동기의 청첩장 모임 자리에서 들었다. 그 즈음 내 입사 동기들 중 몇몇은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고 결혼식 텀도 2-3달 정도였어서 서로 많은 정보를 교류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물론 그 모임에 온 사람 중에 눈치 없고+퇴사를 한 나를 빼고는 다들 결혼 준비를 아는 듯 했고.


무튼 동기들 중에도 막내라인에 속하는 Y가 결혼을 한다고 해서 궁금했다. 같은 팀이었어서 얼마나 그녀가 일에 열정적이고 욕심이 많은지도 알고 있었고, 그 해 초에 굉장히 큰 기업으로 이직을 했기 때문에 결혼은 좀 더 뒤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고민 많이 했지. 아직 30살도 안됐고, 이제 막 이직했고 알다시피 나는 일 욕심도 있잖아. 그리고 다른걸 다 떠나서 지금 결혼하면 너무 많은 기회들을 잃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칼같이 학교 졸업하고 사회생활 시작해서 언니들보다 1-2년의 여유가 있는 것 같지만, 그래서 더 열심히 하고 더 많은 걸 경험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거든. 오빠는 주변 동기들 다 결혼하고 특히 친한 동기들 결혼하고 하니까 빨리 하고싶었던 것 같고. 그래서 한번 헤어졌었지.“


사귄 것도 몰랐는데 헤어졌던 건 더 몰랐다.

나 같은 팀 맞았던거냐

아 하긴, 나의 팀 이동이나 기타 등등의 소식을 제일 먼저 알려주던 그녀였으니 (나 눈치 더럽게 없다)


“근데 오빠가 먼저 다시 만나자고 연락이 왔어. 그때 진짜 엄청 고민을 많이 했던거 같아. 왜냐면 우리는 결혼을 하냐 마느냐 가지고 갈등이 있었던 거잖아. 나는 여전히 마음의 준비가 안된 느낌인데, 이번에 다시 만나게 되면 결혼해야 할 텐데, 그래도 괜찮을까. 이런 고민을 한참 하다가 그래 일단 당장 결혼하자는 거 아니니까 다시 만나면서 적당히 시기를 봐보자 했던거지.”


조곤조곤 자기 이야기를 하는 그녀를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던 것이 느껴졌다. Y의 남자친구는 내 팀 선배의 동기이기도 했는데, 그 시기 즈음에 그 동기 무리들 중 친한 남자 선배들 몇몇이 결혼을 하게 되면서 다들 우리도 결혼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된다는 이야기들도 들었고 또 이렇게 결혼 얘기하다 헤어진 커플도 봤었기에, Y도 그 과정을 겪었구나 싶었다.


“다시 사귀고 얼마 안가서 둘이 여행을 갔는데, 내가 그날 몸이 너무 안좋은거야. 몸살이 걸린건지, 체한건지 무튼 컨디션이 너무 안좋은 상황이었는데, 거기서 오빠가 서프라이즈랍시고 프로포즈를 했어. 우린 아직 언제 결혼하자, 식장은 어디로 하자 등 결혼의 결자도 꺼내지 않았던 상황이었는데. 아마 오빠는 프로포즈가 결혼 준비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나봐.”


요즘은 많이들 결혼 준비의 가장 마지막(?) 과정 즈음에 프로포즈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이 커플은 프로포즈부터 시작했나 보다.


“근데 그날 몸도 안좋고 내가 너무 당황해서 대답을 못했어. yes냐 no냐. 왜냐면 나는 여전히 결혼에 대해서는 최대한 미루고 싶은 상태로 다시 만난거잖아. 그거에 대해서는 오빠한테도 얘기했고. 그래서 아무 대답 못하고 그냥 잠들었는데, 다음날 머리 맡에 약이 있는거야. 내가 아프다고 해서 나 잠든 사이에 오빠가 약을 사다 놨더라고. 이때 결혼해도 되겠다 생각이 든 것 같아. 내가 프로포즈에 yes냐 no냐 대답도 안 했고 그래서 당황스럽고 속상할텐데 그 와중에 나 아프다고 약 사다둔거 보고, 아 이 사람은 어찌됐든 내가 우선이구나, 날 계속 챙겨주는 사람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오빠가 원하는 시기에 결혼하자 라는 생각이 들었어.”


어 이 남자선배 보기와 다르게 섬세하구만?

Y의 이야기는 꽤나 감동적이었다. 어느 여자라도 저런 일을 겪는다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까. 내 감정, 내 상황을 먼저 앞세우기보다 타인의 컨디션, 감정을 먼저 고려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굉장히 훌륭한 동반자가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런 면에서 내 동기 Y도 그와의 결혼을 결심하게 된거 아닐까.

사람들은 순간의 서운함, 순간의 감정에 욱해서 상처 주는 말을 하고, 그 감정을 표출하다가 관계를 망치기도 한다. 그런데 나와 평생 살을 맞대고 사는 사람이 저런 배려를 갖춘 사람이라면 평생을 의지하고 살 수 있는 서로 우호적인 인생의 파트너가 될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 것 같다.


나는 저런 배려심을 갖춘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지만 내가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때 결혼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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