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싸와 아싸 사이의 어딘가
그럴싸라는 신조어가 있다. 정의는 다음과 같다.
인싸(insider: 무리에 잘 섞여 노는 사람)도 아니고 아싸(outsider: 무리에 잘 섞이지 못하는 사람)도 아닌 인싸와 아싸 중간에 '그럴싸' 하게 속해있는 사람들을 일컫는 신조어이다.
나는 혼자 있는 시간에 에너지를 얻고,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일정을 조정하거나 밥은 어떤 걸 먹을지 의견을 맞춰가는 게 무척이나 귀찮고, 만나서 듣기 싫은 얘기나 가치관이 다른 얘기를 듣는 것도 싫어서 자발적 아싸로 지냈다. 굳이 이런 것들을 감내하며 모임을 나갈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왔다. 정작 만나면 누구보다 밝고 유쾌하게 놀기 때문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분명한 아싸였다. 하지만 요즘 나는 조금은 인싸처럼 행동하고 있다. 현 직장에서 함께 보내는 시간이 재밌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누군가를 만나는 게 무조건 싫기만한 일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고, 올해 31살이 되며 오늘이 내 인생에 가장 젊은 날이니 놀 수 있을 때 많이 놀아보자는 인생의 철학이 생기며 활동적으로 시간을 보내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천성이 내향적인 사람이 외향적인 사람인척 행동하며 그럴싸로 지내니 예상하지 못했던 고충을 경험하게 되었다. 나는 아무리 좋은 얘기라도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내 얘기가 나오는 게 끔찍하도록 싫은데,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들은 내 얘기를 하고 다닌다. 나쁜 내용도 아니고 내가 정말 재밌는 사람이라고, 나와 술을 마시는 게 즐겁다는 얘기인데도 기분이 좋지 않다. 낯선 사람이 누구누구씨한테 되게 재밌는 분이라고 들었다며 알은체 하는 것도 싫다. 함께 술자리를 한 번 가졌다는 이유로 나와 친하다고 생각해 선을 넘는 사람도 있었다. 난 그 사람과 둘이 이야기를 해보지도 않았고, 그 자리에 내가 친한 사람이 많았어서 밝게 놀았던 것 뿐인데 친하다고 생각해서 기분 나쁜 장난을 친다던지, 사람들에게 내 얘기하고 다니는 것도 신경이 거슬린다.
요약하자면 두가지 요인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다. 첫번째는 모르는 사람 입에 내 얘기가 오르내린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내가 정해놓은 선을 넘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이다. 혼자서 지낼 때는 가끔은 적적하더라도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일은 없고 평화로운 날들을 보냈는데, 사람들을 많이 만나며 스트레스를 받다보니 역설적으로도 혼자있을 때 보다도 나 자신에 대해 더 곰곰히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왜 이런 일을 겪을 때 불쾌할까? 나는 사람을 한 가지로 정의하는 것을 싫어한다. 모든 사람은 어떤 상황에 처하는지에 따라, 어떤 사람을 만나는 지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갖는다. 특히나 나는 감정 기복도 심하고 낯도 많이 가리기 때문에 이런 점이 더욱 부각되는데, 나의 무수히 많은 모습 중 단 한가지 모습으로만 내가 알려지는 게 싫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얘기더라도 사람들 입에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오르내리는 게 싫다. 그리고 나는 기본적으로 처음 보는 사람을 경계하고, 마음을 열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내가 정해놓은 바운더리를 누군가 침범하면 위협을 느끼고 당황한다. 많은 사람을 알게 되며 그만큼 경계를 침범하는 사람도 많아져서 ‘저 사람은 뭔데 선을 넘지?’하고 안좋게 생각하게 된다.
사실 글을 쓰게 될 정도로 나를 괴롭게 하고 인싸인 척 지내는 것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게 만든 사람이 있다. 그녀는 같은 조직에서 일하긴 하지만, 우리 회사는 재택근무를 하기 때문에 오프라인에서 본 것은 다 합쳐도 4번 정도이다. 그런데 그녀는 첫 만남 때부터 ‘이 분 그렇게 안봤는데 이러이런 사람이였네~’라며 식사 자리 내내 그 얘기를 했다. 두시간 동안 저녁 먹은 게 다인데 처음 만난 나에 대해 그렇게 정의를 하니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세번째 만남에선 사람들에게 ‘아니 얘가~’, ‘얘 봐봐, 왜저래 진짜’, ‘얘 텐션 오르니까 장난 아니네’라며 말을 거드는데 그 모든 말이 불쾌했다. 많은 내향형이 공감하겠지만, 내가 신났을 때 누군가 얘 신났네라고 지적하면 김이 팍 새는데, 그런 기분을 느꼈다. 또 나를 언제 봤다고 얘라고 부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엊그제 만난 네번째 만남에선 ‘얘 되게 똘끼있는데 책은 많이 읽고 의외네’라는 말을 했다. 나랑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똘끼있다고 얘기하는데 너무 무례하게 느껴져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얘기를 평소에도 많이 하고 다니는 사람이라, 이 사람 앞에서는 무슨 말을 못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흘러가듯 누군가 내가 정한 선을 넘는 걸 싫어한다는 얘기를 하자, 그녀는 놀 때 제일 선넘는 게 노는 건 자기면서 웃긴다라는 얘기를 했다. 구구절절 내가 얘기한 선이 어떤 의미인지 더 설명하다가 짜증이 났다. 내가 왜 이런 것까지 설명하고 있어야하는 건지.
사람을 많이 만나며 경험한 장점은 분명히 있다. 내 인생을 새로운 경험으로 채워가면서 느끼는 뿌듯함이 있고, 인생이 더 활기차진 걸 느낀다. 그런데 사람으로 인해 생기는 스트레스를 마주할 때마다 이걸 어떻게 다루어야할지 잘 모르겠다. 기쁜 일이 있는 만큼 부정적인 감정도 느끼게 된다. 다 부질없게 느껴져서 다시 동굴로 들어가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최근에 만나 스트레스를 준 그녀와는 겹치는 동료가 많아 거리를 둘 수 있을지도,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하는 지도 모르겠고, 정말 피하고 싶은데 앞으로도 저런 사람을 또 만날까봐 겁이 나기도 한다. 사람을 더 많이 만나면 경험이 쌓여서 자연스레 이런 것 쯤은 무시할 수 있는 노하우가 생기는 걸까? 큰 스트레스도, 큰 변화도 없던 내 인생에 다양한 감정을 느낀 적은 오랜만이라 혼란스럽다. 서른 살이 넘으면 무던한 삶을 살줄 알았는데, 서른 한 살이 되어서도 새로운 어려움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 시기를 헤쳐나가는 것도 내 인생에 큰 자산이 되겠지. 이제 나는 오기가 생겼다. 아싸가 사람과 교류하며 받는 스트레스를 다루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