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The End
엄마 예전에 왜 그 여자 고시텔 기억해?
거기 있잖아, 내 옆 방에 남자 살았어. 그것도 맨날 술 마시는.
아 그래? 장사가 잘 안돼서 그랬나 보다.
노래하듯이 엄마가 말했다.
우리 가족은 뭐든 크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예전부터 그 부분이 좋았다. 별거 아닌 듯이 넘기는 태도. 누군가는 안전 불감증이냐며, 뒷목을 잡았을 일일 테지만.
이번 일도 그렇다. 엄마에게 정규직을 달았다는 소식은 통화로 알려주었다. 그간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전혀 모르는 엄마에게는 그저 결론만 말한 셈이었다.
아구, 열심히 다니더니 잘됐네.
엄마는 내가 백조처럼 우아하고 평범하게 정규직 자리에 오른 줄 안다. 어떤 야근의 밤들과 싸움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덕에 고고한 척 그간의 이야기를 숨길 수 있었다.
말하지 못했던 이유를 변명하자면, 아등바등했던 내 이야기는 몇 마디로 정의될 수 없어서, 어떤 이야기들은 너무 계산적이고, 또 어떤 이야기들은 비참해서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정규직이 되고 서류를 한가득 제출해야 했다. 복지 카드와 법인 카드도 받게 되었다. 카드에 양각으로 이름이 박힌 것을 보니 실감이 났다. 명함도 만들고 이메일 서명에 ‘인턴’이라고 박혀 있던 부분을 ‘사원’으로 바꿨다.
매달 꽂히는 월급의 금액이 달라졌다. 물론 이게 가장 좋은 것이었지만, 그 외에도 모든 것들을 만끽할 수 있었다. 들어가고 싶었던 회사 동호회에 회원 신청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고, 몇몇 직원들에게 정규직 축하 메시지도 받았다.
그 짧은 축하들은 ‘Motivation’이라는 메일 폴더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지치거나 동기부여를 받고 싶은 날이면, 그 폴더를 열어 본다. 밤에 몰래 꺼내 먹는 소중한 꿀단지처럼.
이후의 이야기 1 어떤 사이다
감 대리나 타 부서의 차장처럼 불편한 인연들은 종종 있었다. 하지만 가끔은 주 이사가 팔을 걷어붙이고 적극 편을 들어주기도 했다.
이의를 제기할 거면 직접 하라는 친절하지만 단호한 메일을 보내며. 주 이사의 합리적이고도 칼 같은 의견에 누구도 반기를 들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려면 처음부터 하나하나 배워야 한다는 건데 누가 그 귀찮은 일을 벌일까.
이후 기세등등 해진 나는 그들에게 더욱 활짝 웃어 보이며 인사를 하고 다녔다. 조용해 주신 덕분에 요즘 아주 살만 합니다. 라고 하듯.
가끔 이런 사이다가 생길 때면, 아직 세상이 꽤 살만하구나. 하고 쾌재를 부르며 악당처럼 웃었다.
이후의 이야기 2 어떤 고구마
정규직이 된 이후에도 종종 새로 입사한 인턴사원들이 눈에 띄었다. 나와 같은 실수를 하고, 똑같은 고민을 하는 치열한 프랜이들. 몇몇은 정규직 자리를 기다리고, 또 몇몇은 기다리다 지쳐 다른 회사로 이직하기도 했다.
어떻게 정규직이 되었어요?
대놓고 물어보는 인턴사원도 있었다. 나는 고민하다 그저 ‘운이 좋았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대답해 놓곤 괜히 불안했다. ‘내가 좀 운이 좋아’ 하고 자뻑하는 것처럼 비칠까 봐. 그럴 때면, 너무나도 쉽게 정규직이 된 것처럼 도도하게 구는 내가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그 질문을 했던 인턴은 결국 몇 개월을 버티다 그만둬버렸다. 몇몇 직원에게 그 인턴의 근황을 물어봤지만, 다들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그 인턴은 자신의 부서에 있는 회사의 제품 카탈로그를 하나하나 다 읽어봤다고 했다. 그 지루하고 내용도 많은걸. 하지만 그의 치열했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어떻게 정규직이 되었냐는 그 인턴의 질문은 내 기억 속에 아릿하게 남아, 결국 이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그 친구를 만나게 된다면, 혹은 만나지 못한다면 그때의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바닷물을 먹더라도 의미 없는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온종일 헤매더라도 그만큼 수영을 잘하게 될 거라고. 그리고 이내 너만의 육지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콜럼버스처럼.
가끔은 치열하고, 또 가끔은 해이해질 당신에게 이 글이, 이 문장까지 읽혔다면 영광스럽고 감사한 일이라는 말씀을 드리며 :)
프랜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