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근래, 주변을 둘러보면 혼자인 사람들이 정말로 많다. 커피숍마다 홀로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이 흔하고 심지어 혼밥을 하는 이들도 자주 목격되는 시대이다. (전 혼자 영화 보는 일은 괜찮지만 아직 혼밥은 힘듭니다.)
골목마다 원룸들이 넘쳐나고 빨래방이나 찜질방처럼 홀로여도 이용 가능한 많은 시설들이 혼자만의 삶도 아주 괜찮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나 또한 (물론 가족가 함께 살고 있지만..) 혼자 다니고 혼자서 일을 처리하는 생활들이 전혀 불편하지도 그리고 어렵지도 않은, 요즘 시대의 흐름과 발을 맞추어 걸어가고 있는(있다고 생각하는) 중이며, 혼자만의 삶도 재밌고 행복할 수 있도록 혼자 놀기의 기술을 터득하며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가끔,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버거운 일을 만나게 될 때, 그리고 인생이라는 예측 불가한 무대에서 길 잃고 방황할 때, 눈빛만으로도 기꺼이 나의 연기에 동참해줄 누군가가 있다면 무거웠던 짐을 잠시 내려놓고 우리(함께)라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음을 또한 잘 알고 있다.
우리 집이 한 지붕 세 가족이었던 시절, 우리 엄마와 옆집 아주머니들은(노랑 망토 오빠의 어머님도 계십니다.) 한집에 살았던 고로 거의 친자매나 다름이 없었다. 누군가의 아버지가 속을 썩이는 날에는 세 분의 어머님들은 한 세트가 되어 환상적인 콤비플레이로 아버님들을 꼼작 못하게 하였으며, 우리들도 당연히 예외 없이 혼날일이 있으면 세 분의 어머님들께 돌아가며 야단을 맞아야만 했었다.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어김없이 서로 나누어 먹었으며 서로의 꺼져가는 연탄불까지 봐줘가며 한 가족으로 살았기에 서로간의 온갖 대소사뿐만 아니라 쉬이 꺼낼 수 없었던 서로의 아픔들도 나누고 보듬으며 함께 할 수 있었다.
그 시절, 내가 정말 좋아했었던 시간이 있었는데 (내가 좋았다기보다는 아마 그 광경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건 바로, 어머니들이 김치를 하던 날들이었다. 셋집 중 누군가가 김치를 담그는 날이 되면 우리의 어머님들은 약속이나 한거마냥 툇마루에 모이시곤 했었고 각자의 냉장고에서 온갖 나물들을 가져오고 꽁꽁 숨겨놓았던 참기름을 꺼내와서는 갓 담근 김치와 함께 밥을 비비시곤 했던 것이다. (항상 우리 어머님들은 주황색 바가지에 밥을 비비셨다. 숟가락으로 밥을 비빌 때, 덜거덕 거리던 그 소리는 아직도 귓가에 아른거린다.) 그렇게 빨갛게 비벼진 밥을 어머님 세분과 어린 우리 형제들이 모여서 열정적으로 퍼먹곤 했었으며 별로 들어간 것도 없었던 그 밥이 또 그렇게 맛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식사를 마칠 때쯤이 되면 바가지 안에는 항상 김치의 머리 부분만(일명 배추 대가리라고 하죠.) 덩그러니 남았었는데 우리의 어머님들 세 분은 항상 그 머리 부분을 서로 드시겠다고 숟가락으로 칼싸움을 하시곤 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줘도 안 먹을 것을 가지고 왜 저렇게 서로 드시겠다고 아웅다웅들을 하시는지, 어린 우리들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기에 우리는 숟가락들을 내려 놓고는 그저 자리를 파했었다. 우리가 떠난 후에도 우리의 어머님들은 여전히 김치 대가리를 두고 다투시는데, 내 눈에는 그 모습이 마치 소꿉놀이를 하고 있는 모양새로 보이곤 했었다. 고만고만한 16살 소녀들처럼, 모여만 있어도 그저 재밌고 땅에 구르는 나뭇잎만 봐도 까르르 웃는 사춘기 소녀들처럼, 그렇게 우리 어머님들의 모습은 동화 속에 나오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나의 기억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내가 고등학생으로서의 인생을 시작하던 시절, 우리 형제들은 다들 어른들이 되어서 각자만의 생활들을 시작했었고 엄마는 몇몇 자녀들이 떠나 휑하던 집을 개조해서 식당을 운영하셨었다.(업종은 염소탕이었습니다. 정말 맛있었어요.) 아빠가 은퇴를 하신 후 시작하신 식당은 꽤 성공적이었고 조금씩 입소문도 나서 엄마는 바쁜 나날들을 보내시고 계셨으며 나 또한 틈틈이 엄마를 도와서 하루하루를 눈코 뜰 새 없이 지내고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던 일 년이 지나고 고2 여름방학이 되었을 때, 아빠와 엄마는 친구 부부들 몇 쌍과 함께 부부동반 여행을 떠나시게 되었고 집에는 나와 대학생이었던 넷째 언니 그리고 남동생 그렇게 셋이서만 나흘간의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너무나 뜨거웠던 여름날, 대문에 '휴가 중'이라는 팻말을 붙여놓고 언니와 나는 마루에 찰싹 달라붙어 좌로 한 바퀴, 우로 한 바퀴, 그렇게 뒹굴거리며 무료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남동생은 아마도 친구들과 놀러 갔었을 겁니다.) 바로 그때, 대문이 벌컥 열리고 양복을 입으신 신사분들 대여섯 분이 우르르 들어오시더니 너무나 익숙한 동작으로 방 안으로 들어가 자리들을 잡으시는 것이었다. 마루와 한 몸을 이루고 있던 언니와 나는 토끼눈이 되어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는데, 한 신사분께서 방에서 얼굴만 뻬꼼히 내미시고는 자연스럽게 식사를 주문하시는 것이었다. (온갖 메뉴를 다 시키셨습니다. 염소탕, 전골, 수육.. 우리 집 메뉴는 다 시키셨던 것입니다.) 정신이 번쩍 들은 나는 얼른 방으로 가서 현재 우리의 상황을 차근히 설명을 드렸다. 그러자 신사분들께서는 이해를 하신 듯 고개를 끄덕거리신 후, 나를 빤히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아, 어머님이 휴가를 가셨구나. 그러면 딸내미가 만들어서 주면 되지.. 냉장고에 재료는 다 준비해 놓으셨을 거잖아. 우리는 괜찮단다."
'헉! 이분들 뭐지? 우리 집을 2차로 오신 건가? 한잔들 하신 거 같기도 하고..'
그렇게 그분들은 방 안으로 들어가신 후 절대로 그냥은 가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셨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언니와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 자리에 망부석들이 되어 서있었는데, 신사분들은 그런 우리들에게 어여 시작하라며 눈빛으로 레이저를 보내시고 계셨다.
잠깐의 망설임 후, 언니는 나를 주방으로 밀어 넣고는 내 두 손을 잡고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써빙은 내가 할게. 넌 요리를 해.. 엄마 하는 거 본 적 있지? 우리 대박을 만들어보자."
'헉! 이 언니는 뭐지? 아까 언니가 마시던 것이 물이 아니라 소주였던가?'
얼떨결에 휩쓸려 버린 나는 냉장고에 엄마가 준비해 놓으신 여러 가지 재료들로 음식들을 만들어냈고 (그래도 본 것은 있어가지고 해 보니까 되긴 되더라고요.) 만들어진 음식들은 언니가 방으로 열심히 전달하고 있었으며, 신사분들은 그 음식들을 하나도 남기시지 않고 다들 맛있게 드셔주셨다. (그날, 우리는 냉장고의 재료를 다 소진하고 말았습니다.) 폭풍 같았던 그 시간이 지나고, 신사분들이 드디어 식사를 끝마치시고는 집을 나서고 계셨는데 처음 주문을 하셨던 분께서 우리 둘을 보면서 말씀을 하셨다.
"학생들! 맛있게 잘 먹었어. 둘이 호흡이 잘 맞네! 둘이 장사해도 되겠어." 그리고 그 신사분은 우리에게 음식값 외에 팁으로 2만원을 더 주셨고, 호탕한 웃음을 남기시고는 우리 집을 떠나셨다.
그 날, 언니와 나는 처음으로 상당히 많은 액수의 돈을 우리 손으로 벌어봤다. (물론, 많은 아르바이트를 했었지만 그렇게 짧은 시간에 솔찬히 많은 액수를 벌어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돈을 잘 가지고 있다가 엄마, 아빠가 휴가에서 돌아오시던 날, 자랑스럽게 전해드렸다.
혼자라면 절대 하지 못했을 일, 혼자서는 무서워서 한 발도 내딛지 못하는 길, 그 일과 그 길을 우리는 함께이기에 할 수 있으며 같이 걸을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분명 혼자여서 편한 일도 있으며, 그리고 혼자만의 시간도 반드시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혼자보다 함께일 때가 더 행복하며 즐거운 순간들도 역시 무궁무진하다. 주황색 바가지의 비빔밥은 혼자 먹는 것보다 머리를 부딪혀가며 함께 먹을 때 훨씬 맛있고, 내가 아닌 많은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들은 나 혼자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맞서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
나는 혼자서도 잘 놀고 혼자 영화 보는 것도 정말 좋아하지만 나의(우리의) 삶 속에서 나는(우리는) 누군가와의 콤비플레이또한 엄청 잘하고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우리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잊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