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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young Mar 14. 2019

여전히 성장 중...

Green (여름은 추억이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이 세를 주어 한 지붕 세 가족이 되기 전 우리 엄마는 먼저 하숙을 시작하셨다. 아마도 내 나이 5-6살 때였던 것 같다. 그리고 대부분 남학생들을 하숙생으로 받으셨다. 딸도 많은 집에서 왜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는 지금 여쭤봐도 시원한 대답을 듣지는 못한다. 그 당시 한 방에 혼자 하숙하던 학생도 있었고 둘이 같은 방을 쓰는 학생들도 있었다. 대부분이 대학생이었지만 간혹 다른 지역에서 유학 온 고등학생도 있었다.

넓은 집이긴 했으나 워낙 많은 사람들이 살다 보니 아침마다 전쟁통을 방불케 했다. 화장실 앞은 항상 길게 줄을 서 있었으며 엄마는 아침마다 도시락을 열댓 개씩 싸고 매일매일 빨래는 산더미같이 쌓였으며 그 와중에 사춘기에 접어든 언니들은 끊임없이 불평을 해대며 하루도 조용히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이러한 혼돈 속에서 고민을 거듭하던 아빠는 결국 어느 날 모든 하숙생들을 모아놓고 커다란 칠판에 몇 가지 규칙을 세우시기에 이르셨다. 빨래를 내놓아야 하는 날. 밥 먹는 시간. 화장실 사용 규칙 등등. 그중 내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마당에 침을 뱉거나 담배꽁초를 버리는 것에 대한 벌금이었다. 이건 나에게 중요한 규칙이었다. 그 이유는 아직 학교나 유치원을 다니지 않는 내가 혹 그 규칙을 어기는 사람이 있을 시 벌금을 받아내는 중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은근히 돈이 되는 일이었고, 심부름으로 남기는 잔돈보다 훨씬 더  재미도 있는 일이었다. 물론, 오빠들에게 이런저런 욕을 얻어먹을지언정 나에게는 잠복근무의 가치가 충분히 있는 일이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이 세상에 없듯이 몇 번의 벌금을 내던 오빠들이 곧 성실하고 자연을 사랑할 줄 아는 모범시민으로 거듭나게 되었고 나의 소일거리는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그 당시 하숙생들은 모두들 넉넉지 못한 형편들이었고 변변한 살림살이 없이 오로지 옷가지 몇 벌과 학교 다니는데 필요한 용품들만으로 생활하며 열심히 본인들의 꿈을 향해 나아가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가끔 간절히 문명을 원하던 때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한일 축구전이 있을 때였다. 이 겉보기에 대궐 같은 집에 텔레비전이라고는 안방에 있는 24인치 칼라 TV 달랑 한 대 이니 이걸로 그 모든 사람들의 간절한 욕망을 채우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한일전이 아니던가! 절대 가만히 앉아서 볼 수 있는 드라마가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이 세상 모든 아버지들은 에디슨이자 맥가이버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 집은 대로변보다 낮은 지대에 지어진 집이다 보니 대문을 열고 들어와 계단을 내려와야만 본채와 마당이 연결되는 구조였었다. 고로 계단에 차례로 앉다 보면 영화관과 비슷한 구조가 된다. 한일전이 있었던 바로 그 날 저녁. 아빠는 하숙생들을 모두 마당에 불러 계단에 앉히고는 TV를 방에서 가져오셔서는 툇마루에 놓으시고 화면 앞에 커다란 확대 브라운관을 설치하셨다. 물론 내 기억으로는 화질은 정말 안 좋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화면 가득 초록색 축구장과 파란색, 빨간색 옷을 입은.. 누가 누군지 모르겠는 사람들이 열심히 뛰어다니는 장면만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곳은 축구경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경기장이었으며 마당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대한민국을 외치는 한겨레 한민족이었다. 결과도 우리나라가 이겼다.. 한일전에서 지면 대역죄인이 되던 때였으니 국가대표들은 얼마나 죽을힘을 다했을고.. 새삼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 날 저녁 우리 집은 삼겹살 냄새가 진동하고 오랜만에 모든 이들이 세상 걱정 내려놓고 맘껏 웃고 즐기며 모처럼만에 여유로운 저녁을 맞이했었다.

나의 기억 속에 이 날은 초록색이다. 축구장도 초록색이었고 그 날 모든 사람들 얼굴의 미소도 한 여름의 초록색이었다. 매일매일이 초록색이었으면 하고 바랬었던 그런 날이었다.

내가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치고 그나마 조금은 어른이 되어가고 있던 고등학교 여름방학 때, 외출을 나갔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이다. 그때는 우리 형제들도 다 자란 상태라 하숙은 더 이상 치지 않았으며 단출하게 우리 가족만 살고 있을 때였다. 물론 이제 하숙을 치고 싶어도 그런 오래된 집에서 하숙을 하겠다고 오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아무튼 집에 가까이 왔을 때, 누군가(30대 중반으로 보이는)가 우리 집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내가 잔뜩 의심을 품고 노려보자 그분께서 뒤통수가 뜨거우신지 돌아서서는 나를 바라보셨다. 그리고는 대뜸 나의 이름을 물으시는 게 아닌가?  친척이신가? 잘 기억 안 나면 먼 친척분이실 거라는 이 소박하며 단순한 두뇌 상태를 가진 나는 순순히 이름을 말했으며 그분께서는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네가  벌써 이렇게 큰 거야?. 어렸을 때 엄청 귀여웠는데." (욕인 거 같다) 이러시는 게 아닌가. "누구신가요?" (역변해서 죄송합니다. 지금 모습은 잊어주세요. 다이어트할게요..)

알고 보니 그분은 대학생 때 우리 집에서 하숙을 하던 분이셨고 그 당시 대구에 살고 있으며 충주(우리 집이 있는 아름다운 내 고장)에 볼 일이 있어 왔다가 하숙하던 시절이 그리워 찾아왔다고 한다. 혹여 우리가 이사를 갔으며 어쩌나 하는 마음으로 가슴을 졸이며 찾아왔다고.. 그런데 모든 것이 그대로라 눈물이 난다고.. 엄마도 우시고 그분도 우시고 난 이게 왠 뜬금없는 이산가족 상봉 장면이 나며 옆에 멀뚱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날도 역시 눈부시게 초록색이 무성하던 여름이었다. 가장 힘들었지만 가장 푸르던 시절.. 모든 게 부족하지만 마음만은 행복했던 시절.. 그 젊음이 그리운 사람들... 이것이 내가 초록색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것들이다. 그 당시 그 하숙생들을 더 이상 만나지는 못하지만 우리 집도 이제 그곳은 아니지만 우리 모두가 푸르렀던 그 시절은 언제나 마음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언젠가 또다시 한일전 축구경기를 보게 될 때 그 순간이 그 푸르른 여름에 함께했던 우리를 하나로 연결해주기를...  그 아름다웠던 젊음의 미소가 지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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