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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young Mar 13. 2019

여전히 성장 중...

White (종이비행기)

나는 큰 언니, 둘째 언니와의 어린 시절 기억이 별로 없다. 워낙에 나이 차이가 많은 관계로 세대 자체가 달랐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주로 셋째, 넷째 언니 그리고 남동생이다. 한 배에서 나와도 다 아롱이다롱이라는 옛 어른들의 말씀은 정말 옳은 말씀이시다.(어른 말씀 잘 들으면 뭐로 가도 중간은 간다.)

셋째 언니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딸 부잣집 셋째 아니던가!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둘째 언니를 낳고는 엄마가 고민이 많으셨다고 한다. 아이의 코가 너무 동양적이었던 고로 갓 태어난 아이를 안고 일찍이 시집보낼 고민을 하셨다 하니 둘째 언니가 새삼 노발대발하고도 남을 일이다. 어쨌건 그 일로 인하여 셋째를 가졌을 때 우리 엄마는 남다른 태교를 하셨고 그 노력의 결과로 셋째 언니는 정말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세상 드라마와 영화가 완전히 허구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이 이쁜 얼굴에 성격까지 완만하지는 않았다. 우리 집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남동생도 함부로 하지 못한 게 셋째 언니였으니 할 말 다했다. 넷째 언니는 그에 반해 아주 무난한 성격으로 모든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어울리며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성격의 소유자였고 늘 남자아이들보다 여자 친구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어느 여학교에나 한 명 씩 꼭 있는 그 학교의 명물이었다. 이런 극과 극의 틈 속에서 나는 언제나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는 언니들의 온갖 심부름 셔틀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억울하다.. 언젠가 꼭 갚아주리라..)

그 사건은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인 걸로 기억한다. 사건의 요지는 이렇다. 넷째 언니가 여자 친구들에게 너무 인기가 많은 고로 동네 남자아이들의 표적이 되었고 결국 남자아이에게 맞고 오는 사건이 발생했다. 물론 내가 기억하기론 정말 살짝 맞았다. 아마도 등짝 정도? 그런데 그 일이 셋째 언니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셋째 언니는 기어코 그 남자아이를 찾아내서 싸다구를 날리게 된 것이다. 이 일로 동네의 모든 남자아이들의 결속력이 다져지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정말 그동안 우리에게 쌓인 게 많았었나 보다.) 그리고 바로 운명의 그 날 나는 늘 언제나 항상 변함없이 마당에서 혼자 놀기를 하고 있었고 그때 내 머리 위로 하얀색 종이 한 장이 두둥실 떠 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공중에 오래 떠 있는 종이는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하얀색 종이비행기였다는 것을 알고는 기분이 굉장히 좋았었다. 그 비행기는 활주로에 안전하게 착륙하는 진짜 비행기처럼 내 발 앞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이게 말로만 듣던 딸 부잣집에 솔찬히 날아온다는 러브레터인가? 누구한테? 난 아직 너무 어린데.. 한글도 간신히 뗐는데... 언니들한테 온 거라면 쉽게 넘겨주지 않겠어! 뭐라도 얻어내야지... 떨리는 마음으로 비행기를 집어서 조심스럽게 펼쳐보았다. 헉.. 그건 러브레터도 그냥 잘못 날라 들어온 비행기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동네 남자아이들이 고심해서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쓴 결투 신청이었다. 시간이며 장소까지 명확한. 나는 얼른 가장 든든한 셋째 언니에게 그 편지를 보여주었지만 언니는 대수롭게 생각하지도 않은 채 편지를 찢어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넘어가는 듯했다. 그런데 왜 꼭 이런 일은 나한테만 생기는지.. 하필이면 그 날 저녁에 엄마가 두부 심부름을 나한테 시키셨고 까마귀 고기를 먹은 것 같은 나는 편지는 까맣게 잊고 기필코 잔돈을 남기리라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대문을 나섰다. 슈퍼를 가기 위해 큰길로 들어서는데 동네 오빠들 열댓 명이 일렬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때 불현듯 그 결투 신청이 생각이 났다. 지금 내가 저 길을 지나가면 난 인질로 잡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길로 나는 잔돈이고 뭐고 간에 가던 길을 돌아서서 빛의 속도로 집으로 도망을 오고 말았다.

이 사건의 대한 나의 기억은 여기까지이다.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어쩌면 동네 어르신들께 오빠들이 혼나고 그 길로 흩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건 한 동안 자라목을 하고 다니던 기억만 난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이 또한 내 어린 시절의 소중한 기억이다. 파란 하늘에 두둥실 떠있던 하얀 종이비행기. 종이비행기도 그렇게 오래 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누가 만들었는지.. 꼭 비행기 만드는 사람이 되었기를 소망해본다.)

종이비행기 만들어 본 지도 정말 오래되었다. 왜 어른이 되면 손으로 하는 소소한 것들의 재미를 잊는 걸까? 오늘 한 번 만들어서 아파트 베란다에서 날려볼까? 어쩌면 그 하얀 종이비행기가 누군가의 마음을 설레게 할지도 모를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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