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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young Mar 17. 2019

여전히 성장 중...

Gray (눈꽃 그리고 회색 연기)

봄은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계절이다. 새싹들이 돋아나고 온 만물이 한 해를 시작하기 위해 기지개를 켜는.........

자연 만물뿐만 아니라 우리네 인간들도 봄은 마음가짐을 새로이 하며 각자만의 무언가를 시작하는 그런 계절이 아닌가 싶다.  학교들도 새 학기를 시작하고 새로운 계획들을 실천하면서 다가올 겨울에 모두들 풍성한 결실이 맺어지기를 소망하며 꿈을 키워가는 계절인 봄.. 이런 봄은 보통 온갖 색깔들의 꽃과 푸르른 풀들 그리고 맑고 파란 하늘이 생각나기 마련이다. 물론 나에게도 봄은 쑥 색깔과 진달래 색깔, 그리고 개나리색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봄에 대한 또 다른 기억들이 있다.
우리 집이 하숙생들로 늘 북적이던 시절. 두 명이 같이 한방을 쓰던 대학생들이 있었다.  그 학생들의 방은 주인인 학생들 외에도 늘 친구들로 붐비곤 했다. 그 좁은 방에서 뭐를 하겠다고 그리 열심히들 놀러 오던지. 우리 엄마는 그렇게 매일 본인들 집처럼 들락날락하는 학생들에게도 화 한번 내시지 않고 우리도 아까워 먹지 못하는 과일이나 음료를 내어주시곤 했다. 당연히 그 심부름은 내 몫이었으니..(내가 생각해봐도 그 당시 난 참 착했네..) 나는 그 대학생 오빠들이 늘 머리를 맞대고 그 좁은 방에서 무언가 작당 모의하는 장면들을 너무 많이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늘 궁금하던 일은 정작 방 주인들은 책을 읽거나 잠을 자거나 그 작당모의에서 늘 빠져있었다는 것이다. 그저 놀러 온 객들만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를 하고 있었으니 어린 내가 보기에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이긴 했다.

그리고 그 해 봄.. 새 학기가 시작되고 두 달 쯤이 지나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꽃비가 내리기 시작하던, 이제 날이 좀 길어지고 저녁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던 어느 날 저녁 그 아름답던 하늘에 회색빛 연기가 날리기 시작했다. 나는 여느 저녁처럼 그저 마루에서 TV를 보고 있었고 그 회색빛 연기가 그저 뒷동네에서 쓰레기를 태우거나 불을 피우는 연기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눈이 매워지고 코가 매워지면서 눈물이 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TV에서 슬픈 장면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난데없이 눈물이 나오는 이유를 알지 못하던 그때 갑자기 대문이 벌컥 열리고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 세네 명이 우리 집으로 뛰어들어왔다. 아니 무슨 도둑놈들이 저렇게 당당하게 대문을 열고 들어온단 말인가? 그런데 그 도둑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하숙생 오빠들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나는 눈물을 쏟으며 펑펑 울어버렸다. 그 울음이 무서워서인지 아니면 그저 눈과 코가 매워서 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마루에서 목놓아 울어버렸다. 내 울음소리에 방에 계시던 그리고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시던 아빠와 엄마가 허둥지둥 나오셨고 상황을 알아차린 아빠는 냉큼 대문을 잠가 버리셨다. 그렇게 거의 일 년 내내 하루 종일 잠가지지 않던 우리 집의 대문은 그날 암호를 대야만 열리는 알리바마의 문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그 도둑들은 아주 멀쩡한 모습으로 우리 부모님께 석고대죄를 하고는 무사히 본인들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 날 하늘에 날리던 꽃비와 회색빛 연기, 그리고 우리 집 장독대에 내려앉은 검은 재는 나에겐 울음이고 슬픔이었다.

20살의 봄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설레는 계절이 아닐까? 성인이 되었고 생전 처음 집이 아닌 다른 도시에서 살게 되었으며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는 계절.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낯선 그런 계절. 나의 스무 살 봄도 다른 이들과 별반 다를 거 없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롭게 배우는 것들에 익숙해지느라 정신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봄의 시작을 지나 다시 그 어리던 어느 봄처럼 꽃비가 내리기 시작하던 스무 살 봄의 어느 날, 학교의 강의가 모두 휴강이 되었고 할 일이 없어진 나는 오랜만에 엄마나 보러 가볼까? 하고 책가방을 챙기고는 강의실을 나서서 교문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 넓은 캠퍼스에 이렇게 사람이 없다니... 일이 생기긴 했다보다 하고 서둘러 교문을 향해가는데, 교문에 가까워질수록 등골이 오싹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아주 어린아이였을 때 그 마루에서 목놓아 울게 했던 그 도둑들이 이제는 수 십 명 아니 수 백 명으로 늘어나서 교문 앞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오고 가지도 못한 채 그저 그 장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마침 집으로 가던 한 선배님을 만나 우리는 교문을 무사히 빠져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교문 밖은 더 어마 무시했으니 말로만 듣던 해골이 그려진 장갑차에 온몸을 무장한 군인들이 학생들과 대치를 하고 있었다. 오로지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선배와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버스정류장까지 죽을힘을 다해 뛰어갔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학교를 갔을 때 학교는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이곳저곳에 깨진 병들이 흩어져 있었고 잔디밭도 군데군데 불타 있었으며 건물들과 교문 외벽도 검은빛으로 그을러 져 있었다. 한쪽에서는 미화원분들께서 음성 지원되는 찰진 말씀들을 쏟아내시면서 그 모든 것들을 치우고 계셨다. 그것이 내가 대학생활 동안 본 유일한 데모 현장이었다. 그리고 그 데모 현장은 내 어린 시절 우리 집을 알리바마의 비밀 동굴로 만들어 버린 그 도둑들을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기도 했다.  그 흐드러지게 내리던 꽃비와 회색빛 연기가 사무치게 슬펐던 그 날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슬픈 장면이었다.

물론 내 어린 시절의 도둑들과 내 대학생 동기 도둑들의 슬픈 싸움의 이유는 다르지만 나는 그 도둑들의 싸움이 똑같이 가슴 시리게 아프다. 그리고 그 두 봄의 아름다움도 또한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임을 안다. 이것이 내가 매년 봄 꽃비를 볼 때마다 회색빛이 생각나는 이유이니까..

이제 다시는 회색 연기 속의 꽃비를 보지 않기를.. 무서워서인지 혹 매워서인지 모를 눈물이 흐르지 않기를.. 이 세상 젊은이들이 맘껏 꿈을 펼칠 수 있기를.. 그 당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이 못난 어른이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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