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llow (우리 같이 놀까요?)
노란색이 아니라 노랑색이었다. 아마도 6살쯤... 그리고 나에겐 색에 대한 첫 기억이기도 하다.
우리 집으로 가구며 전자제품이며 온갖 살림살이들이 들어오고 처음 보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고 가며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던 그때 나는 마당 한쪽 정원 테두리에서 열심히 혼자 놀기 기술을 시전하고 있었다.
그 작은 턱에서 오르고 뛰기를 반복하며 마치 높은 산을 오르고 내리는 것처럼 잔뜩 자랑스러워하고 있던 그 순간... 내 눈 앞으로 샛노랑 색이 아른거렸다. 내 또래로 보이는 한 남자아이가 노랑 빵모자의 노랑 망토를 입고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의 노랑색은 지금도 아주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는다.
우리 집은 그 시대 즉 80년대 초반의 대부분의 가정처럼 대가족이었고 드라마에서 많이 보던 딸 부잣집이었다. 우리 엄마는 친가의 남아선호 사상의 결과로 딸을 무려 다섯이나 낳으시고는 삼십 대 후반에 드디어 아들은 낳아 그나마 시집살이에서 벗어나 이제 막 큰 며느리의 체면을 차리고 있던 때였고 반대로 나는 그 딸들의 대열의 마지막을 장식한 다섯 번째, 동생으로 남자아이가 태어난.. 앞으로 고생길이 예약된, 그러나 자아가 아직은 덜 성장한 소위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놀기 바쁘던 어린아이였었다. 아버지는 동사무소 공무원이셨고 엄마는 많은 식구를 책임진 전업주부였다. 늘어난 가족에 우리 집은 무리해서 큰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보기에는 넓은 집에 방도 많은 구조였으나 실제적으로 딸들을 한 방으로 몰아넣고 부모님과 남동생이 한 방을 쓰며 나머지는 다른 가족에게 세를 주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은 바로 우리 집으로 한 가족이 이사를 오게 된 날이었던 것이다.
난 늘 많은 사람 속에 북적이며 살았던 터라 그리 낯을 가리지 않았고 모르는 사람들이 오고 가는 속에서도 그냥 혼자 놀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순간 눈 앞에 너무나도 노랑색의 형체에 당황한 나는 놀던 것을 멈추고 그 남자아이를 바라보았다. 그 아이는 그저 그 자리에서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뻘쭘한 시간이 어색했던 나는 "같이 놀래?"라고 그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나의 그 한 마디에 그 남자아이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환하게 웃으며 나의 혼자 놀기에 동참했다.
나의 기억 속에서 왜 이 노랑색이 생생히 기억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나에겐 부러움이었을지도....
우리 집은 넉넉지 못했고 언니들 학비에 생활비에 아버지가 받으시는 국가의 녹은 우리 대가족을 건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 연유로 나는 유치원을 다니지 못했다. 그래서 그 남자아이가(알고 보니 나보다 한 살 많은 오빠였다. 뭐, 이제 같이 늙어가고 있으니까 봐줍시다.) 입은 노랑색 유치원복이 부럽고 샘이 났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유치원을 안 다녔다고 해서 살아가는데 아무 지장도 불편도 없지만 그때 아침마다 그 아이가 노란색 망토를 두르고 유치원을 가던 것이 속상하면서도 마냥 부러웠던 것 같다.
지금 그 아이(오빠)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어린 시절 마당에서 늘 혼자 놀던 그 여자아이가 기억에 없을지도 모르지만 나한테 그 아이(오빠)는 나의 기억 속에서 항상 노랑 망토의 소년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새삼 어른이 되어 이 기억을 떠올리면서 드는 생각이 있다. 우리는 모두 어린 시절 어느 누구 하고나 잘 어울리고 금세 친해졌었는데, 지금의 우리는 어느 누구한테도 쉽사리 "같이 놀래?"라고 말하지 못한다. 어른이 되어서 그런지 사람을 새로이 만나면 늘 생각이 많아지고 두려움도 많아진다.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경계를 해야 하나? 나에게 도움이 될 사람인가?
불현듯 그 노랑색이 생간난 것은 어쩌면 지금도 누군가를 만나면 "같이 놀래요?"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