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규 아버지. 김동현 씨도 아들의 결혼 문제로 고민이 많았다. 그가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은 벌써 몇 년 전이다. 김동현 씨는 나와 오래된 인연이 있다. 한국에서 캐나다 이민을 준비할 때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서 몇 번 모임을 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다. 흔한 말로 이민 동기다.
이민 동기란 이민을 가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 주로 모이는 온라인 카페를 통해 모임을 만들고 반갑게 안면을 트고 정보를 교환하면서 친해진 사람들이다. 주로 가족단위로 만나다 보니 가족 구성원 모두 서로 알고 지내는 일이 많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만나는 사람들이니 일가친척보다 더 친밀한 관계가 되기도 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캐나다에 입국한 순서대로 뒤 사람들의 길 안내를 해주면서 동지나 선후배처럼 의리 같은 것이 생기기도 한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알아서 할 수 있는 집을 구하고 차를 사는 사소한 일도 처음 이민을 온 사람에게는 한 살 배기가 막 걸음마를 배우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다. 언어의 문제가 가장 크기는 하지만 아는 것이 많지 않고 경험도 없고 동네에 대한 정보도 없다 보니 초기 이민자가 예상치 못한 낭패를 보는 경우도 많다. 한국은 중산층의 주거지가 아파트인데 반해 캐나다에서 '아파트'는 이민자 나 저소득층, 젊은 이등 삶이 안정되지 않은 사람들의 주거공간이다. 관리가 부실해 위생 등 거주 환경이 좋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게다가 비슷한 인종이나 같은 국가 출신들끼리 모여 사는 경향이 있어서 주거지역을 자칫 잘못 정하면 참기 어려울 정도로 독한 냄새에 시달리기도 하고 무슬림이나 유대인 또는 흑인이 절반인 학교에 아이를 보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거주지를 어디에 정하느냐 에 따라 이민 생활의 만족도가 달라진다. 그러니 함부로 아무 동네나 아무 집에 이사 가면 안된다.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한국에도 다양한 외제차가 팔리고 있지만 내가 이민 오던 시절에는 듣도 보도 못한 다양한 '외제차' 중에 어떤 자동차가 좋은지 중고차는 얼마가 적정가인지 알 수 없었다. 시장 가격보다 비싸거나 문제가 많은 차를 사고 두고두고 후회하는 일도 다반사다.
요령껏 정보 수집을 한다고 해도 초기 이민자가 혼자서 결정하고 추진하기에는 뭔가 불안하고 찜찜한 일들이다. 자동차나 집 같은 큰 사안뿐 아니라 하다못해 길 찾는 것도 익숙지 않고 생활필수품 구입도 어디 가서 무엇을 사야 하는지 몰라서 헤매고 다니는 어리바리한 상태가 한동안 지속된다. 그럴 때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있다면 훨씬 편하게 초기 정착을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내고 이른바 ‘정착 서비스’를 받기도 하지만 믿을만한 이민 동기가 나서 준다면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 해진다.
그 과정 중에 서로 마음이 상해서 관계가 나빠지는 사람들도 허다하지만 김동현 씨는 나에게 좋은 동기이자 선배가 되어 주었다. 김 동현 씨 가족과 우리 가족은 이민 준비자 모임에서 여러 차례 만나고 친해졌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아이들도 오빠 동생 하면서 잘 지냈었다. 김 동현 씨네 가족이 우리보다 먼저 캐나다로 출국했고 우리 가족은 몇 개월 늦게 캐나다에 도착했다.
오뉴월 하룻 볕이 무섭다는 속담처럼 먼저 캐나다에 도착한 김동현 씨는 고작 몇 개월 먼저 온 사람이라고 치부하기엔 캐나다 생존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하늘 같은 선배였다. 피붙이 하나 없는 캐나다에서 가족처럼 가까워진 이민 동기들은 서로의 집을 오가며 밥도 같이 먹고 공원에 가서 고기도 구워 먹으면서 외로움을 달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민은 현실'이다 보니 여행자들처럼 마냥 놀고먹기만 할 수도 없었고 위안삼아 만난 관계가 항상 좋을 수도 없었다. 이민 동기 가정들이 하나 둘, 생업을 찾아 멀리 이사를 가기도 했고 각자 먹고 사느라 분주해지면서 어쩔 수 없이 만남도 소원해졌다. 김동현 씨네도 토론토를 떠나 인근 시골로 이사를 가서 얼굴 보고 얘기 나누기 어려워졌다. 그래도 가끔 전화기 너머로 아이들 크는 얘기나 사업이 얼마나 잘 돌아가고 있는지 건강은 괜찮은지 안부를 묻고 고단한 이민자의 삶을 위로받는 말 그대로 이민 선후배 사이다.
김동현 씨는 20년 전 IMF 사태로 다니던 직장에서 갑자기 정리해고를 당했다. 대한민국의 앞날이 막막하니 미국으로 일을 하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너나 할 것 없이 나라를 떠나던 시절이니 그 행열에 동참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취업 비자도 사업 비자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대안으로 캐나다행을 택했다. 캐나다 영주권은 미국에 비해서 수월했다. 이민을 가지 않겠다고 버티던 아내를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지만 아이들은 여행이라도 가는 줄 알고 따라나섰다. 캐나다에 도착한 후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가족들은 각자 알아서 적응하고 살아야 했다. 김동현 씨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뭘 해야 평생 먹고살 수 있을지 판단하는 게 쉽지 않았다. 식당 주방 일은 적성이 맞지 않아 금방 포기했다. 세탁소에서 일을 할 때는 독한 화학 제품들 때문에 건강을 해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주유소에서 주유원으로 일을 해본 적도 있는데 하루 종일 밖에서 지내야 했고 겨울이면 추위에 얼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나마 일하던 주유소가 self (셀프주유소)로 바뀌면서 젊은 직원 몇 명만 남기고 모두 해고되었다.
배관이나 자동차 정비, 용접 같은 기술을 배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늦은 나이에 새롭게 시작하기엔 너무 오랫동안 공부에 발목이 잡혀 있어야 했다. 그럴 마음에 여유도 능력도 없었다. 목수나 막노동은 나이가 더 들면 힘들 것 같아 처음부터 시작도 안 했다. 그나마 가장 만만한 일이 편의점 점원이었다.
영어를 잘하지 못해도 고객을 상대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고 이미 중년에 접어든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만큼 노동 강도도 적당했다. 도매상에 가서 물건 떼다가 진열하고 하루 종일 돈 통 앞에 서서 고객을 상대하는 정도 일이니 할만했다. 새벽에 가게 문을 열고 자정이 다 돼서 문을 닫아야 하기 때문에 부부 둘이서 번갈아가며 꼼짝없이 가게에 매여 있어야 하는 단점이 있었지만 다른 어떤 일보다 수월했다.
남의 편의점 직원으로 일하면서 눈치껏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다. 2000년대 초반 캐나다 이민을 온 다수의 한인들이 선택한 직종이라서 서로 정보 공유도 수월했고 가지고 있는 예산 안에서 적당한 편의점을 인수하기도 수월했다. 한국에서 최고 대학을 나와 그럴싸한 경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편의점을 인수했다.
몇 년 동안 경험이 쌓이고 이골이 붙으면 목 좋은 새 가게 자리를 물색해 새롭게 열기도 했고 쓸만한 편의점 여러 개를 인수해서 ‘편의점 재벌’ 이 되기도 했다. 한인이 모이는 장소 어디를 가든 대세는 편의점 사장이었다. 이민자들이 몰려들면서 오랫동안 백인들이 운영하던 편의점을 한인이나 중동계 이민자들이 인수하기 시작했다.
수익이 좋은 편의점은 권리금이 치솟았다. 토론토 인근 어느 곳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 길가 편의점 아무 곳이나 문 열고 들어가 한국말로 길을 물으면 한국말로 답변을 들을 수 있고 라면에 김치도 얻어먹을 수 있을 거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던 시절이었다.
시골로 갈수록 경쟁이 적고 마진도 좋았다. 김동현 씨도 먹고사는데 문제가 없겠다 싶어 토론토 인근 작은 시골 마을에 집까지 달린 편의점을 인수했다. 편의점 전 주인은 그 자리에서 20년 동안 장사를 해서 아이들도 잘 키웠고 돈도 많이 벌었다며 가게를 팔고 미국 플로리다로 이사를 가서 노후를 즐길 거라며 요란스럽게 자랑을 했다. 20년 전 자신들이 편의점을 인수할 때 그 전 주인도 20년 동안 편의점을 하고 은퇴했다 하면서 김동현 씨에게도 20년 후에 은퇴하고 좋은 곳으로 가라고 했다. 그 가게는 적어도 40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셈이다.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김동현 씨가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일을 못할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킬 것 같은 편의점이었기에 망설이지 않고 인수했다.
퇴직금과 가지고 있던 전 재산을 투자한 것이니 일이 잘못되면 큰일이라는 생각으로 밤낮없이 열심히 일하면서 전 주인이 말한 대로 언젠가는 플로리다나 밴쿠버 같이 춥지 않은 곳으로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 편의점은 큰 어려움 없이 운영이 되었다. 인근에 경쟁할만한 다른 편의점이 없어서 독점하다시피 했다. 코스트코 같은 홀세일 매장 두세 곳에 일주일에 서너 번씩 새 물건을 사러 가야 할 만큼 재고 걱정 없이 장사가 잘 되었다.
부지런히 움직이면 먹고사는데 문제없는 것에 감사했다. 김동현 씨가 사는 시골 마을은 조용하고 변화가 별로 없는 백인 마을이다. 뜨내기손님은 얼마 없고 대부분 그 지역에 오래전부터 거주하던 사람들이 김동현 씨의 가게를 찾았다. 그런데 영어를 못하는 김동현 씨 부부가 단골손님인 동네 이웃과 친하게 지낼 수 없었다. 동네 단골들이 편의점에 와서 반갑게 인사를 하고 동네 사람이 다 아는 소식으로 수다를 떨 때도 알아듣는 척 미소만 짓고 있어야 했다. 동네 사람들은 김동현 씨 부부가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사교적이지 않거나 돈 버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영어가 문제다. 이민자로 살면서 넘기 힘든 큰 산이다.
이민 초기에 먹고사는 일을 해결해야 했던 김동현 씨는 영어 공부할 틈도 없이 일을 찾아 나섰고 김동현 씨 부인은 바쁜 남편 대신 영어 공부를 책임지기로 했다. 죽기 살기로 하면 어지간히 의사소통을 하겠거니 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수다 하나는 자신 있었으니 영어로 수다를 떨 수 있을 만큼 공부를 해보겠다 다짐을 하고 이민자 영어 학교를 열심히 다녀봤다. 그러나 머리와 입은 따로 놀았고 영어 실력은 늘지 않았다.
딸은 어린 나이에 캐나다에 온 덕에 가족 중에 가장 적응이 빨랐다. 학습 능력도 좋았고 눈치가 빠른 덕에 백인 애들만 있는 학교에서도 잘 적응했다. 자라는 내내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가족 중 영어를 가장 빠르고 쉽게 배웠던 딸은 부모가 영어를 못해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고작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공과금을 내는데 문제가 생겼을 때 몸이 아파 병원에 가서 증상을 설명해야 할 때 심지어 학교에 가서 오빠 담임 선생님과 면담을 할 때도 통역을 했다. 어릴 때부터 그런 일을 도맡아 해서 그런지 일찍 철들고 자기 할 일을 스스로 알아서 척척 해냈다. 김동현 씨 부부는 딸이 대견하면서도 내심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 편의점 관련 일만큼은 딸이 나서지 못하게 했다. 가게에는 오지도 못하게 했다.
어린 나이에 어른스러워진 딸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편의점이 물건을 사러 오는 아이들 중에 아들과 딸의 학교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큰아들 연규는 공부 머리가 없는 아이였다. 남자아이들끼리 어울려 다니며 농구도 하고 축구도 했지만 공부는 뒷전이었다. 캐나다 애들은 다 그렇게 자라니 그런가 보다 했다. 그래도 착했다. 학교 생활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별 탈 없으니 잘 적응한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어느 날부터 연규 또래 아이들이 가게를 들락거리다가 초콜릿이나 사탕 같은 작은 물건들을 슬쩍슬쩍 집어가면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화도 나고 당황스러웠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만 하다가 모르는 척 눈 감아 버리기로 했다. 영어를 못하니 동네 사람들과 시끄럽고 번거로운 일 만들어 봐야 유리할 것이 없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무슨 일이라도 당할까 하는 걱정도 생겼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아들 연규에게 더 큰 문제를 만들었다. 물건을 훔치던 녀석들이 급기야 연규에게 가게에서 물건을 가지고 오라고 시키기 시작했다. 작은 시골마을에서 항상 친구에 목말랐던 연규는 아이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작된 연규의 비행은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다른 집 물건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고 동네가 떠들썩한 사건을 몇 번 겪었다.
아내는 집과 편의점을 팔고 다른 동네로 이사 가자고 했다. 편의점을 내놓고 이사를 가려고도 해봤지만 작은 시골마을에 들어와서 편의점을 하겠다고 나서는 적당한 구매자가 없었다. 하필 그 시기에는 이민자 유입이 뜸한 때였고 집까지 달린 편의점을 인수할 수 있는 돈 있는 사람은 시골마을까지 이사 오는 것을 꺼려했다.
손해를 감수하고 시세보다 싸게 팔았다면 사겠다는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동네로 이사해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겁이 나서 주저했다. 공들여 자리 잡은 편의점을 팔고 다른 곳에 가서 새롭게 시작한다고 해도 아이가 좋아질 거라는 확신도 없었다. 그래서 ‘캐나다 사람 사고방식'으로 아들 인생은 아들이 알아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저 시기가 좋지 않았을 뿐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라고 여겼다.
그 대신 김동현 씨 부부는 보험처럼 열심히 돈을 벌었다. 아침 7시에 김동현 씨가 가게 문을 열고 점심때까지 가게를 봤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까지는 아내가 가게를 봤고 밤이 되면 김동현 씨가 다시 가게를 봤다. 시간제로 직원을 쓰기도 했지만 대부분 부부가 일을 했다. 날마다 11시까지 장사를 했다. 남들이 말하는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위해서 한인들과 골프도 치고 주일에는 교회도 갔지만 하나님 말씀에서 얻는 위안보다 돈이 주는 위안이 더 컸다.
돈 쓸 시간이 없으니 버는 대로 모아뒀다. 그래도 얼핏 삶이 무료했고 한국이 그리울 때도 있었다. 김동현 씨의 아내가 “이렇게 살려고 이민 왔나”라고 말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이민을 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한국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상상을 현실처럼 되짚어가며 위로했다. 한국에 살고 있는 전 직장 동료들이 얼마나 고단하게 살고 있는지 얘기해 주었다.
실제로 한국에 살고 있는 옛 직장 동료들과 가끔 연락이 닿을 때마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김동현 씨를 부러워했다. “한국은 IMF 이후로 직장인에게는 희망이 없고 자영업자에게는 빠져나올 수 없는 모래 지옥이 되었다"라는 얘기를 한탄처럼 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동현 씨에게 “ 이민 가길 잘했어, 그때 나도 짐 싸서 따라갔어야 했는데 이제는 늦었지.”라는 말을 했다.
시골 구석에서 구멍가게나 하면서 아들 하나 건사 못하고 하루 열여섯 시간 동안 가게에 매여 있는 삶이 딱히 부러워할 일도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길을 찾아봐. 아무래도 캐나다가 좋긴 하지" 했다. 틀린 말도 아니었고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시시콜콜 사는 얘기를 솔직하게 해 봐야 자기들끼리 입방아나 찧어 댈 테니 조심스러운 면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캐나다 오길 잘했다'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짐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동현 씨 부부에게 아들 연규는 두고두고 풀기 어려운 숙제였다. 연규는 동네에서 불량한 아이로 낙인찍힌 채 그 아이들과 그대로 고등학교에 갔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겨우겨우 전문 대학교에 들어갔지만 결국 졸업도 못하고 토론토 이곳저곳에서 시답지 않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얼마 전부터 김동현 씨가 하는 편의점에서 일을 하고 있다. 어차피 잘 된 일이었다. 오랫동안 변화도 발전도 없이 운영되던 편의점에 젊은 손길이 필요하기도 했고 부부도 나이가 들수록 일이 지겨워져서 그 일에서 벗어나고 싶어 졌다.
철들 것 같지 않던 연규도 그즈음엔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가게 일을 했다. 동네 사람들하고도 썩 살갑게 잘 지냈다. 결혼시켜서 편의점을 물려주면 큰 욕심 없이 만족하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김동현 씨는 나에게 아들 연규를 결혼시킬 참한 여자를 소개할 수 있는지 물어 왔다. 연규가 그다지 참한 놈이 아니니 며느리에 대해서도 큰 욕심은 없고 다만 시골에 들어와서 연규와 같이 편의점을 운영하면서 알콩달콩 살 여자면 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우리 애들한테 미안한 게 많다는 건 장실장도 알잖아? 시골 들어와 살면서 동네 사람들하고 어울리지도 못하고 그러다 보니 애들이 힘들게 살았어. 딸은 그래도 저 혼자 잘 컸는데 아들놈이 문제네... 장가는 보내야 할 텐데 연애를 하면 좋겠는데 그런 주변도 못 되는 것 같아.. 언젠가 백인 여자애를 애인이라고 데리고 온 적이 있기는 하지 … 그런데 우리 부부가 안된다고 선을 그었어. 말도 안 통하는 백인 여자를 며느리로 들이면... 아휴, 안돼, 안돼! 손자가 생겨도 정이 안 갈 것 같아. ”
전화기 넘어서 김동현 씨가 손사래를 치거나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듯했다.
“요즘 젊은 아가씨들이 시골에서 컨비니언스나 하면서 살고 싶어 하지 않겠지만.. 우리 연규가 요즘 맘 잡고 잘 살거든. 큰 욕심 없이 살면 우리 동네도 살기 좋아요. 토론토처럼 복잡하지도 않고 작은 동네라도 있을 건 다 있고 공기 좋고 사람 좋고. 나는 영어를 못하니 동네 사람들하고 인사나 하면서 살고 있지만 영어 잘하는 아가씨가 들어오면 동네 사람들하고 잘 어울릴 수도 있고 , 살기 좋아. 이럴 때 도시 사는 사람이 좀 도와줘. 돈 벌어서 다 뭐 하겠어. 어차피 그게 전부 연규한테 갈 텐데. 집도 큰 걸로 새로 샀고 애들끼리 살 작은 타운 하우스도 하나 사줄 거야. 그러니까 아가씨만 있으면 돼.”
내 고객 중에는 영주권을 얻고 싶어서 배우자 찾기에 나선 많은 미혼들이 있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많아 발이 넓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중매를 요청하는 지인도 종종 있었다. 그래서 몇 번 중매쟁이로 나서 봤지만 번번이 좋은 소리를 못 들었다. 그러니 그즈음엔 누가 중매를 요청해도 건성으로 대답하고 관여하지 않았다. 연규가 어떻게 자라왔는지 다 알고 있으니 누구에게 선뜻 소개할 만큼 탐탁지도 않았다. 김동현 씨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알아보겠습니다” 하는 형식적인 대답을 하고 잊어버렸다. 전화를 끊고 몇 년이 지난 후 김동현 씨에게 다시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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