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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 혜진 Feb 16. 2019

10. 남자답게 이 사랑을 지키겠습니다.

한국에 남겨진 애인을 데려와 결혼을 하고 싶은 게이의 지고지순한 사랑



남자답게 이 사랑을 지키겠습니다

박진우 씨로부터 오랜만에 이메일을 받았다.

‘실장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연락드립니다. 쑥스럽지만 실장님도 반가워하실 것 같아 소식을 전합니다. 제가 드디어 온타리오 치과의사 면허를 받았습니다. 치위생사로 일하던 치과에서 이제 의사로 고용해 주겠답니다. 당분간 월급쟁이로 일하다가 여건이 되면 개원할 생각입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고 있습니다. 그간 고생한 것도 후회스럽지 않습니다. 행복합니다. 모두 실장님 덕분입니다. 보답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네요. 이가 불편할 때 찾아와 달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너무 멀어서 어렵겠죠? 혹시라도 여기까지 오신다면 공짜로 진료해드리겠습니다. 비자 문제 때문에 상의드릴 것이 있기는 합니다만, 오늘은 기쁜 소식만 전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행복하세요.’ 


박진우. 2016년 초겨울이 끝나갈 무렵, 우여곡절 끝에 나가기로 한 오래되고 낡은 캐나다 교회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내가 교회 문턱을 드나든 게 벌써 20여 년째다. 일요일마다 집에서 빈둥거리기보다는 교회에 가서 사람이라도 만나는 편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시작된 출석이었다. 지금도 습관처럼 출석하지만 대단한 열정은 없다. 속된 말로 ‘나일론 신자’이고, 고상하게는 ‘선데이 크리스천’이다. 일요일 오전에는 주섬주섬 준비를 마치고 교회에 간다. 한인 이민자가 모이는 교회는 캐나다 지방마다 없는 곳이 없다. 특히 토론토에는 대형 교회도 여러 개 있다.


어디나 그렇듯, 사람이 모이면 서로 의지하고 도우면서 위로가 되지만 시기와 질투 때문에 상처를 주고받으며 시시비비가 끊이지 않는다. 토론토 한인 교회도 그런 곳이다. 처음에는 나도 많은 사람이 모이는 큰 한인 교회에 나갔다. 살면서 내가 지은 많은 죄부터 아담과 이브가 지은 원죄까지 회계하고 용서받을 일이 많았다.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까 두려워 예수님 말씀에 집중하려고 노력도 쏟았다. 그렇지만 게으른 탓인지 교인들과 친분이 두터워지지는 않았다. 덕분에 핑곗거리만 생기면 교회를 옮기기 일쑤였고, 토론토 시내 한인 교회를 순회하듯 출석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더 이상 한인 교회에 나가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느 한인 교회든 나는 고객과 마주쳤다. 몇몇 사람은 나에게 반가움을 표했지만 속마음까지 알 수는 없었다. 대부분은 어색하게 피했는데, 그중에는 귀신이라도 본 듯 까무러치게 놀라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그들의 부끄러운 구석을 세세히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가벼운 음주운전 정도는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사람들 틈에서 심각한 범죄기록이나 숨기고 싶은 사연을 가진 이들이었다. 사기 전과자, 폭력 전과자, 간혹 성범죄자도 있었다.


 작은 교회의 한 장로님은 한국에서 빚쟁이들이 쫓아와 괴롭히자 나를 찾아와 도움을 청하기도 했었다. 정황상, 운영하던 사업체를 고의로 부도낸 후 돈을 들고 도주한 듯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한인 변호사 한 명을 소개했는데 그 후로 별다른 소식을 듣지는 못했다. 단지 그 장로님이 교인 몇몇 사람에게 내 흉을 보고 다녔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왜 그러셨을까. 대체로 ‘뒤가 구린’ 사람일수록 내 험담을 하고 다녔다. 영주권 문의를 했던 어떤 사람은 사석에서 나를 만나면 불편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들이 불편해하니 나도 불편했다. 반대로 분명히 남 부끄러운 사연을 가지고 있음에도 나를 스스럼없이 대하는 사람을 만나면 오히려 내가 꺼림칙했다. 이래저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감출 것이 많은 사람 중에는 한인 이민대행사를 피해서 중국인이나 유대인이 운영하는 회사를 찾는 이도 있었다. 그마저도 언어 문제가 걸림돌이 되면 사적으로 만날 가능성이 적은 사람을 수소문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방문 예약을 하겠다고 전화를 걸고는 나에게 어느 동네에 사는지, 어떤 교회에 나가는지 먼저 묻기도 했다. 사생활 영역을 확인하고 겹치는 부분이 있다면 상담 예약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손바닥만 한 토론토 한인 사회에서 얼마든지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어느 일요일, 집에서 가까운 작은 교회의 오후 예배에 불쑥 참석했다. 그곳에도 영주권 취득 방법을 여러 차례 문의했던 사람이 있었다. 멀리서 눈이 마주쳐 고갯짓으로 인사를 주고받는데 그의 얼굴에 난감함이 스쳤다. 특별히 숨길 사연이 없던 사람이라 내가 잘못 봤겠거니 생각하고 앉아 있다가 예배 막바지에 조용히 교회를 나왔다. 그다음 날,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다짜고짜 내게 그 교회에 계속 나올 것인지를 물었다. 의도를 알 수 없어 어정쩡하게 “집에서 가까우니 그럴까 합니다”라고 했더니 더듬더듬 본인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교인들은 제가 영주권이 있는 줄 알아요. 실장님은 캐나다에서 영주권 없이 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시죠? 같은 한인끼리도 영주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나눠서 차별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래서 처음 그 교회에 갔을 때 얼떨결에 영주권자라고 해버렸어요. 그런데 어쩌다 보니 몇 년째 출석하고 있네요. 제가 영주권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른 교인들이 알면, 제 꼴이 우습게 되지 않을까요? 그러니 실장님, 그 이야기는 하지 말아 주세요.” 이건 또 무슨 희한한 소리일까. 토론토에는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람이 영주권을 목표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 게다가 영주권이 없으면서 있는 척하고 살기도 쉽지 않을 텐데, 무슨 꿍꿍이일까 싶었다. 하지만 내가 그들의 속을 다 알아야 할 이유도 권리도 없었다. 군소리 없이 “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전화를 끊었다. 문득, 그들도 나처럼 지은 죄를 회개하려고 열심히 교회에 나가는 것일 텐데 내가 방해꾼이 되는 게 아닌가 걱정스러워졌다. 왜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 


그래서 한인들이 잘 가지 않을 법한 오래된 교회로 적을 옮겼다. 캐나다 사람들이 주로 모이는 이 교회는 건물도 낡은 탓에 금방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다른 교회보다 젊은 사람이 많아서 신기했지만 그 외에 특이점은 없었다. 간혹 동양인이 눈에 띄면 한국인인지 아닌지 가늠하려고 힐끔힐끔 눈치를 봤다. 그마저도 모자라, 늘 꼴찌로 들어갔다가 일등으로 나오면서 그들과 마주칠 일조차 만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교인 중 한 남자가 이민 상담을 왔다. 이름은 박진우. 나이는 30세. 칼리지 치위생 전공 본과 졸업반. 큰 키는 아니지만 호리호리한 몸매에 깔끔한 차림새였다. 누가 봐도 호감 가는 인상이었고 숱 많은 머리를 샤기컷으로 빗어 넘긴 멋쟁이였다. 교회에서도 눈에 띄는, 전형적인 한국 사람이었다. 짧게 인사를 나누고 내가 먼저 교회 이야기를 꺼냈다. “저, 혹시…” 미리 알리는 게 마음이 편하니까. 역시나 남자는 난감한 표정이었다. “네, 우리 교회에 나오시는군요.” 어색한 순간이었다. 남자는 잠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말없이 천장을 올려다봤다. “ 제가 괜히 말씀드렸나요? 불편하다면 다른 데 가셔도 됩니다.” 과장된 웃음을 지으며 농담조로 말했더니 남자는 “그러게 말입니다. 난감하네요”라며 진지하게 반응했다. 


박진우 씨는 한참 동안 교회 이야기만 했다. 영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교회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면서 나에게는 어떤 모임에 나가냐고 물었다. 나는 느지막이 교회에 갔다가 제일 먼저 빠져나오는 게으른 나일론 신자라서 소속된 모임이 없다고 실토했다. 내 신앙의 실체를 눈치챈 듯 그는 슬며시 웃더니 본인이 한국에서 어떤 교회를 언제부터 나갔고 담임 목사는 누구였는지, 어떤 선교 활동을 했는지 등 자신의 ‘신앙 경력’을 자랑하듯 늘어놓았다.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 손 잡고 교회에 나갔어요. 지금도 하나님께 의지하려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요. 지금 나가는 교회는 제가 다녔던 교회 중 최고예요. 이런 교회가 있다는 게 큰 축복이에요.” 박진우 씨의 신앙심이 부러웠다. 무슨 복을 받으면 저렇게 신실할 수 있을까. 의심이 많은 나는 따라가기 어려운 경지다.


나를 찾아와 이민 상담을 하는 사람 대부분은 다른 대행사 서너 곳을 투어하듯 다니면서 정보를 얻은 후 마음에 드는 업체와 계약을 한다. 상담 시간을 할애했다고 그가 반드시 내 고객이 되라는 법은 없다. 이민 상담 따위 집어치우고 피차 편하게 잡담이나 하다가 돌아가도 서운할 것 없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본인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음, 제가 유학 후 이민을 하려고 토론토에 온 지 2년이 다 돼 가거든요. 이번 5월에 졸업합니다. 코업(Co-operative)비자로 일하던 치과에 취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후에 영주권 신청도 하려고 하고요. 취업해서 돈을 벌기 시작하면 한국에서 누굴 데리고 오고 싶어서요.”

“누구요?”

“애인요.”

“본인이 체류비자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애인에게 당장 비자 후원을 할 수는 없어요. 한국에서 혼인신고를 하는 방법이 가장 쉽습니다.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면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혼인신고만 먼저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한국에서 혼인신고 하기가 여의치 않아서요.”

“아니면 두 분이 사실혼 관계라는 것을 입증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분이 캐나다로 와서 같이 일 년을 살아야 합니다. 그 후에 비자 후원을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죠.”

“일 년씩이나 일도 못 하고 캐나다에 와서 살 형편은 안되고요.”

“캐나다에서 결혼하는 방법도 있죠. 한국보다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도 더 걸리지만 비자 후원을 하기에는 좋은 방법입니다.”

“캐나다는 결혼식을 어떻게 하나요?”

“시청에 가서 결혼식을 할 거라고 얘기하면 결혼허가서(Marriage Licence)를 발급해 줄 겁니다. 주변에 주례를 서줄 사람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면허가 있는 결혼식 집행인을 섭외할 수 있습니다. 주례와 일정을 정하고 배우자 될 분이 입국해서 결혼식을 올리면 됩니다. 주례가 두 분이 결혼했음을 정부에 신고하면 혼인증명서(Marriage Certificate)를 발급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서둘러서 진행한다면 두 달 후에는 혼인증명서가 발급될 거예요. 그러면 배우자 오픈 워크 퍼밋(Open Work Permit)을 신청할 수 있습니다. 비자가 나오면 일도 할 수 있죠. 복잡하지만 가장 빠르고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별다른 문제는 없을까요? 한국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와 버렸는데 비자가 안 나오면 곤란하니까요. 영주권이나 시민권이 없어도 결혼하는 게 가능한가요?”

“결혼은 신분과 상관없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특별한 결격 사유만 없으면 동반비자를 받는 데도 문제가 없습니다.”

“결격 사유는 뭐가 있나요?”

“가장 흔한 게 범죄기록이고, 그 외에는 특별히 걱정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영주권을 받는 것은 가능할까요? 토론토에 오기 전, 유학원에서는 별문제 없이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요즘 상황을 봐서는 쉬워 보이지 않던데요.”

“일단 영어 성적과 경력이 어떤지 따져봐야 합니다. 한국에서 무슨 일을 하셨나요? 학력은요? 해를 넘길수록 나이 때문에 불리해지겠지만 아직은 괜찮습니다. 경력과 학력도 중요한데 한국에서 일한 경력은 있으시죠?”

그는 잠시 주저하더니 “치과의사입니다. 아니, 였습니다” 하면서 멋쩍게 웃었다.

“좋은 경력을 두고 오셨군요.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일이니 아직 치과의사라고 말해도 될 것 같은데요. 쉽지는 않겠지만, 치과의사는 자격증을 바꾸면 캐나다에서도 일할 수 있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영주권을 받고 난 후에는 캐나다 자격증에 도전할 생각입니다. 요즘 공부 중인데 쉽지는 않네요.”

“그래서 치위생 전공을 선택하셨군요. 한국 경력이 있으니 아무래도 접근하기 쉬울 것 같아서.”

“네, 맞아요.”

“캐나다 영주권은 세 가지가 중요해요. 영어 점수를 최대한 높게 받고, 지금 다니는 칼리지 졸업하고, 취업해서 세금 보고를 하는 것. 상황이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 저와 자주 연락하면서 변경 사항이 있을 때마다 대처하면 됩니다. 나이도 젊고, 치과의사를 할 정도면 공부 머리도 있을 테고 칼리지에서 공부하고 있으니 영어 점수도 어지간하면 나오겠군요. 그런데 너무 애쓰지 말아요. 안 되면 한국으로 돌아가면 되지 뭐. 살아보면 알겠지만 캐나다가 기대만큼 대단한 나라가 아니에요. 치과의사를 포기할 만큼….”


열심히 공부한 대가로 받은 치과의사 면허까지 포기할 만큼 캐나다 영주권이 대단한 건 아니니까, 한국으로 돌아가는 방안도 염두에 두라는 뜻으로 말했다. 2015년 1월, 캐나다 영주권 제도가 급격하게 바뀌는 바람에 한국 사람들은 이전보다 영주권을 받기가 어려워졌다. 자칫하면 고생만 하다가 얻는 것도 없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많은 치과의사의 배우자나 아이들이 조기유학 목적으로 캐나다에 체류 중이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불편과 외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오랫동안 기러기로 지내는 이유는 아이들의 행복을 뒷바라지해 줄 돈 잘 버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이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얻은 자리를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영주권을 받아 온 가족이 캐나다에 와서 살다가 혼자 한국으로 돌아간 치과의사가 있었다. 오래 캐나다를 떠나 있었기 때문에 본인의 영주권은 말소된 상태였다. 10년 넘게 기러기 아빠로 살면서 가족의 생활비를 책임졌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삶에 회의가 들더란다. 50살 먹도록 열심히 살지 않은 날이 없는데,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지 알 수 없었다. 왜 치과의사가 되었는지, 결혼은 왜 했는지, 아이들은 왜 낳았는지, 무엇 때문에 살았는지. 10년 넘게 아이들 얼굴은 6개월에 한 번씩, 방학 때만 봤고 아내와도 견우와 직녀처럼 만났다. 돌이켜보면 가족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영주권을 받고 캐나다에 와서 살겠다며 나를 찾아와 푸념처럼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캐나다에 와서 어떻게 먹고살지가 막막했다. 결국, 남자는 가족과 합류하기를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영주권 수속도 철회했다. “아무래도 아이들 대학 졸업시킬 때까지는 돈을 벌어야 할 것 같아요” 하면서 쓸쓸하게 웃었다. 인생이 허무해지기 시작하는 중년에 접어들었지만, 가족을 부양할 돈벌이를 내려놓을 용기는 없었나 보다. 대부분의 치과의사가 그랬다. 젊은 박진우 씨가 치과의사라는 타이틀을 버리고 캐나다에 와서 살겠다고 하는 게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살다 보면 캐나다가 지겨워지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올 테니까.


“그런데, 실장님…”

박진우 씨는 무슨 대단한 고백이라도 할 것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더니 책상 모서리에 시선을 두고 뜸을 들였다. 

“저는 한국으로 안 가요. 안 가기로 했어요.” 결연한 의지가 그의 말끝에 슬쩍 비쳤다.

“그러시든지….”


박진우 씨는 한국에 있는 애인과 이야기를 나눠보겠다면서 “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하고 돌아갔다. 그 후 한동안 소식이 없었다. 역시나 다른 곳으로 간 것인가. 다른 사람들처럼 숨기고 싶은 사연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교회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게 아니라면 굳이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나 칼리지 졸업 시즌인 5월, 박진우 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의외였지만 반갑기도 했다. “실장님, 지금 찾아봬도 될까요? 실장님 말씀대로 여기서 결혼식을 하려고 합니다. 애인이 오기로 했는데… 실장님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더니 한 시간도 안 돼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마주 앉은 박진우 씨는 쌀쌀한 5월인데도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흐트러짐 없는 샤기컷 헤어스타일에 깔끔한 옷매무새, 여전히 멋쟁이였다.


“실장님, 제가 그러니까… 실장님을 귀찮게 해 드릴 마음은 없는데… 부탁할 사람이 없네요.”

무슨 부탁일까 싶어 긴장되었다. 그래서 눈만 끔뻑이며 그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졸업하면 서둘러 결혼식을 할 겁니다. 캐나다에서는 돈과 시간만 있으면 누구나 결혼할 수 있더군요. 그런데 이것저것 알아보다 보니 결혼식 증인으로 두 사람 필요하다네요.”

“그렇죠. 신부 측과 신랑 측, 양쪽 증인이 사인을 해야 합니다.”

“저는 칼리지 친구가 증인으로 서주기로 했어요. 그런데 한 명이 더 필요해서요.”

“아, 신부 측 증인이 필요하시군요? 그걸 저보고 해달라고 부탁하시는 거예요? 저한테?”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의 결혼식 증인을 서는 일이 재밌으면서도 부담스러웠지만, 그보다 왜 하필이면 나에게 부탁을 하는지가 궁금했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수도 있지만… 제 애인이 한국분이면 더 좋을 것 같대요. 상징성이랄까. 한국 사람에게 둘의 결혼을 인정받고 싶은가 봐요. 저도 그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런데 제가 아는 사람 중에는 이런 일을 부탁할 만한 분이 없어요.”

“아, 한국 사람.”

“보답은 하겠습니다. 시간당 비용을 계산해서 두 시간 정도에 맞는 수고 비용을 드리겠습니다. 여기는 들러리에게 돈을 주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정도 수고비는 드려야죠.”

“신부가 원한다면… 저는 영광입니다. 먼 곳만 아니면 잠깐 시간 내서 다녀오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시청에서 하실 건가요?”

“아뇨. 교회에서 할 겁니다. 목사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어차피 목사님과 증인 몇 명만 참가할 테니 교회 작은 방에서 하면 됩니다. 목사님이 흔쾌히 그러자고 하시더군요.”

“잘됐네요. 그럽시다. 일정 알려주시면 그날 시간 비워 둘게요.”

“그런데… 실장님.”

박진우 씨는 지난번처럼 나직한 목소리로 불러놓고 책상 모서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뜸을 오래 들였다. 

“신랑만 둘입니다.”

“네?”

무슨 말인지 잠깐 생각했지만 금세 이해했다. 박진우 씨는 혼자서 어색하게 웃었다. 

“제 애인도 남자거든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몇 번 경험해 본 상황이었다. 상대가 어색해하는 것도 익숙했다. 뭔가를 숨기는 것 같더니, 그래서 그랬구나.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익숙한 일입니다. 캐나다가 왜 캐나다겠어요.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게 벌써 10년도 넘었으니까요. 동성결혼 배우자 초청도 몇 케이스 진행해 봤어요. 제가 그 입장이 안 돼 봤으니 다 이해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남들 사랑에 제가 반대냐 찬성이냐 할 만큼 오지랖이 넓지도 않습니다. 일은 일이니까 편하게 생각하셔도 됩니다. 저는 세상에 절대로 일어나면 안 될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남한테 피해 주는 일만 아니면 개인 사정은 별 신경 쓰지 않아요. 더구나 세상이 많이 변해가고 있잖아요.”


캐나다에 와서 ‘동성애자, 동성결혼, 성 소수자’라는 말을 수시로 들었고 동성 배우자 초청 고객도 간혹 있었다. 고객 맞춤용 립서비스는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깊이 아는 것도 없었다. 그저 내 생활에 피해만 없다면 그들 취향대로 살게 놔둬도 된다고 생각했다. 만약 ‘내 딸들이 여자를 좋아해서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하면 용납이 될까’ 하는 상상을 해본 적은 있었다. 피부색이 다른 남자친구를 사귄다고 해도 신경이 곤두설 텐데 동성 애인이라니…. 백번 양보해서 자식 인생이 부모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는다고 해도, 사회적 편견과 맞서야 하는 고단한 삶이 걱정돼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았다. 캐나다에서 살면 한 번쯤은 미리 걱정해보는 문제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만나는 고객, 내게 동성애자는 ‘일’의 영역에 가까웠다. 무심결에 습관처럼 립서비스는 했지만 문득 걱정이 되었다. 동성 커플 결혼식에 증인을 서면 성가신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싶었다. 나 같이 서비스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은 정치적 견해를 표현하기도 쉽지 않고 민감한 사회 문제도 대충 눈 감고 사는 게 속 편 하다. 누군가 입에 거품을 물고 나와 다른 의견을 말할 때 배시시 웃으면서 듣고만 있는 게 ‘장사’에 도움이 된다. 한인 대부분은 보수적인 교파에 속한 기독교인들이다. 내가 동성애자 결혼식에 증인으로 참석했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결혼식 증인을 안 하겠다고 하실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입니다. 제가 캐나다에 이민 온 이유도 그 사람 때문이에요. 커밍아웃도 했어요. 그냥 아무도 모르게 캐나다에 와서 같이 살까 생각했지만 부모님에게 이민 가는 이유를 납득시키려다 보니 어쩔 수 없었죠. 여기 오기 전 양쪽 부모님께 인사도 드렸어요. 난리가 났었죠… 저는 이쪽으로 도망치듯 와버렸지만 그 사람은 한국에서 많이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아요.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야 계획대로 일을 추진할 수 있으니까 그 사람이 돈을 벌어서 제 뒷바라지를 했죠. 벌써 2년 넘게 헤어져 있었는데 빨리 데려오고 싶어요. 당장은 경제적인 문제나 경력 단절이 큰 난관이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기도 하지만, 그 사람하고 편견 없는 곳에서 살 수 있다면 도전해 보고 싶어요. 캐나다에서 치과의사 자격증을 따면 정착하고 살 수 있겠죠?”

기죽은 듯 쭈뼛거리던 박진우 씨는 내가 증인을 서주겠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꽤 수다스러워졌다. 가끔 쑥스럽게 웃기도 했다. 나는 생각할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수고비를 준다고 하지 않나. 그냥 일이라고 생각하면 돼’ 하고 자신을 위로했다. 


“그런데 목사님이 주례를 서주겠다고 하시던가요? 그 교회가 동성결혼을 찬성하는 쪽이었나요?”

일요일에만 잠시 앉아 있다 나오는 ‘나일론 교인’이다 보니 교회 특성이 어떤지, 교인들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어서 바보 같은 질문을 던졌다. 

“우리 교회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군요. 캐나다 교회는 동성결혼을 찬성하는 교회가 많아요. 그중에서도 우리 교회가 선구적인 역할을 했죠. 캐나다 최초 동성결혼을 한 곳도 우리 교회예요. 그때는 사회적인 반감이 심할 때라, 목사님이 방탄조끼를 입고 주례를 섰다더군요. 벌써 몇십 년 전이에요. 저는 실장님이 우리 교회에 나오시길래 알고 나오신 줄 알았어요.”

“아, 그렇군요. 몰랐어요.”

“목사님이 주례까지 서주겠다 하시니 감사한 일이죠.”

박진우 씨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고개를 숙였다. 감정이 격해져서 눈물이 나는 걸 참는 듯했다.

“어릴 때 제가 다른 친구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미쳤다고 생각했죠. 저만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 더 자라면서 저 같은 사람을 ‘게이’라고 한다는 걸 알았죠. 남자인데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요. 실장님은 게이에 대해서 잘 모르시죠? 저희 결혼에 증인도 서주실 건데… 제 이야기를 좀 해드릴게요.”


박진우 씨는 경기도에서 치과의사인 어머니, 대학교수인 아버지 사이에서 자랐다. 두 살 터울 형이 있다. 온화하고 자상한 부모님 덕에 큰 말썽 없이 공부 잘하는 모범생으로 자랐다. 본인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중학교 무렵 어렴풋이 알았다.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 때였기에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홍석천이 커밍아웃을 했던 2000년대 초반, 그 무렵이었다. 게이가 뭔지도 모를 때였지만 친구들과 더럽다면서 욕을 했다. 사춘기 소년들에게 게이는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을 경멸했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여자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어떤 여자아이가 먼저 사귀자고 해서 연애를 해본 적도 있다. 대학 시절에도 주변에는 항상 여자들이 있었다. 조건 맞는 누군가와 사귀다가 결혼해도 될 것 같았다. 운명적인 사랑은 아니라도 괜찮았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결혼하고 늙어 간다고 하니까. 한 여자와 일 년 넘게 무덤덤하게 사귀기도 했다. 좋은 여자였다. 그 여자와 사귀면서도 끌리는 남자를 보면 마음이 심란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헤어졌고, 한동안 그 여자를 향한 미안함이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 없었다. “절대로 게이는 안 될 거라고 다짐하고 다짐했어요. 그렇게 마음먹으면 될 줄 알았죠.”


어릴 때부터 엄마를 따라 나갔던 교회 의료봉사팀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한의사다. 키 크고 잘생겨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은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은 여자나 남자나 비슷하다. 다만 누군가에게는 친구 같은 호감이고 누군가에게는 연애 감정이 생길 뿐. 동성애자라고 해서 모든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연애 감정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도 사람 대 사람으로 호감이 생겼다. ‘사람 참 괜찮네’ 하는 정도였다. 자주 만났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대학교를 졸업하던 무렵 의사고시에 떨어지고 세상이 달라졌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해마다 졸업생 100%가 붙는 의사고시에 혼자만 떨어진 것이었다. 살면서 그런 좌절을 맛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대학에 입학할 때도 모든 것이 막힘없이 순탄하게 흘러갔다. 대학교 때 성적도 좋았다. 왜 의사고시에 떨어졌는지 이해가 안 됐다. 누군가에게는 그 정도 일에 그렇게까지 좌절하는 모습이 우습게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살면서 큰 난관 없이 살아와서 그런지 예상치 못한 좌절 앞에서 죽을 것처럼 힘들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보니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인생을 살면서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들을 돌아봤다. 의사가 적성에 맞는지, 다른 꿈은 없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인생 전반을 되짚어보는 시간이 됐다. 다행히 치과의사라는 직업에 거부감은 없었다. 대학 때 혼자 해외여행을 해보고 싶었지만 부모님 반대로 무산됐던 일, 기타를 배워보고 싶었지만 재능 탓하며 포기했던 일이 떠올랐다. 공부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었고 다른 친구들처럼 일탈을 해본 적도 없는 데다 반항은 꿈도 꿔본 적 없던 모범생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인생 참 재미없게 살았네’ 하는 회한이 들기는 했다.


‘게이’로서의 정체성도 되짚어 봤다. “제가 중학교 때 나이 많은 여자 국어 선생님을 좋아했어요. 친구들이 늙은 여자를 좋아한다고 놀렸지만 어쨌든 여자를 좋아했던 것으로 봐서 게이는 아니라고 생각했죠. 지금 생각해 보면 일종의 우기기였던 것 같아요. 또래 여자를 좋아한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제가 게이라고 단정 짓기는 싫었어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죠.” 힘든 시기에 교회 형제들과 만나 고민을 나누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자연스럽게 그 형과도 자주 만났다. 사람으로서 호감 가는 ‘좋은 형’이었는데, 문득 그에게 연애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음은 점점 더 명확해졌고 어릴 때 혼란스러웠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도 기억이 났다. 그러나 거부했다. 그래서 형도 피했다. 교회도 안 갔다. 의사고시 시험 준비에만 매달렸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치과의사고시에 합격했고 어머니 병원에서 일을 시작했다. 무난하게 살았다. 고작 1년 동안 고뇌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고 없던 일이 돼 버렸다. 뭔지 모를 그리움과 허전함, 이유 없이 슬픈 감정이 들기는 했지만 평화로웠다. 부모님들처럼 바람 한 점 없는 평온한 들판 한가운데서 평생 그렇게 살면 됐다. 


평화가 깨진 것은 치과의사로 일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대학병원에서 인턴을 마친 형이 늦은 입대를 하게 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외진 산골 마을에 공중보건의로 가게 됐는데 훈련소 입소를 앞두고 교회 형제들이 송별회를 해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가끔 형이 그립기도 했지만 애써 외면하는 중이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송별회에 나갔다. 교회 형제들은 의사고시 준비 때문에 교회에 안 나온 줄 알았는지 누군가 “합격했으니 이제 교회도 나올 거지?”라고 하더라. 당연한 일이다. 아무도 속마음을 눈치채지 못했을 테니,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살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형이 일을 벌였다. 커밍아웃을 한 것이다. 형이 게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눈치조차 챌 수 없었다.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누구와 사귀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없어서 단지 눈이 높은가 보다 했지, 게이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커밍아웃을, 그것도 교회 형제들 앞에서 한 것이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그럴 만한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냥 느닷없이 “나 남자 좋아해”라고 말했다. 그런 농담은 하는 게 아니라며 누군가 핀잔을 줄 때 다 같이 동의했다.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러다 형의 표정을 보고 진담이라는 걸 눈치채자 모두 조용히 경악했다. 그 틈새에서 비슷하게 반응했다. 다른 사람들이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을 지을 때 같이 당황스러워했다. 그런데 형은 작정이라도 한 듯, “나는 그동안 너하고 썸을 탔다고 생각했어. 못 보는 동안 너무 그리웠어”라고 말하고는 물끄러미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이후로 뭐가 어떻게 됐는지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는 게 별로 없었다. 쭈뼛쭈뼛 몸을 일으켜 그 자리에서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서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차라리 어디 죽을 만큼 아파서 병원에 입원이라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몇 날 며칠 죽은 듯 잠들어 버리기를 바랐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게 출근했지만 가슴은 찢어지게 아팠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교회 형제들의 전화를 받지 않았더니 문자가 왔다. 형이 교회에 나오지 않겠다고 하고 떠났으니 신경 쓰지 말고 교회에 나오라며. 불쌍하기는 하지만 치료받고 회개할 수 있도록 다 같이 기도해주자는 내용이었다. 


“제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는데, 하나님은 저를 게이로 놔두시더군요. 기도해서 고쳐질 병이 아니라는 것은 진작 알았어요. 의사 친구들에게도 물어봤더니 치료 방법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어요. 억누르고 살아야 하는 거죠. 누군가는 그러더군요. 젊어서 한때 지나가는 열병 같은 것이니 마음 맞는 여자 만나서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괜찮아질 거라고. 여자랑 결혼하라고… 저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생각과 마음은 다르더군요.”


귀신에 홀린 것처럼 몇 개월을 참고 살았지만 이러다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형이 근무하고 있는 산골 마을에 찾아갔다. 그날 생각했다. 결혼한다면 형이랑 해야겠다고. 모든 것이 명확해져서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연애를 시작했다. 형처럼 공중보건의로 시골에 가서 살았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 만나면서 연애를 했다. 행복하게 3년이 지났다. 여느 이성애자 커플처럼 사소한 일로 다툰 적도 있었지만 사랑은 점점 더 단단해졌다. 


그러다가 형이 먼저 “다른 나라에 가서 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북유럽 국가, 미국의 몇 개 주, 그리고 캐나다 같은 나라는 동성결혼이 합법이라면서. 일종의 프러포즈였다. 형은 지고지순한 사람이다. 여자와 연애를 한 적도 없다더라. 흉내를 내는 것도 싫었지만 부모님에게 희망을 주면 나중에 좌절도 클 것 같았다고 했다. 형의 부모님은 형이 어릴 때부터 그가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인정하거나 용납하지는 않았다. “저러다 말겠지” 했다더라. 형은 부모님 등쌀에 못 이겨 끊임없이 선을 봤다. 형이 선을 보러 간 날은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어차피 주위 편견 때문에 부부로 인정받고 살 거라는 기대는 해본 적도 없었다. 연애를 오래 하다 보면 결혼하고 싶어지는 게 당연한데 그럴 수 없는 현실이 서글펐다. 


“실장님, 게이나 레즈비언이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이라고 많이들 생각하잖아요? 다 그런 것은 아니에요. 성적으로 문란하게 살려면 결혼 안 하고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어요. 이성과 결혼한다고 해도 배우자 눈 속이면서 자유롭게 살 수 있죠. 커밍아웃하고 결혼하는 게 훨씬 더 보수적인 사람들이에요. 저희가 왜 굳이 남들 시선 의식하면서 결혼을 하겠어요. 남들에게 인정받는 부부로 살면서 서로에게 의무를 다하고 싶은 거죠. 당연히 부부로서 권리도 행사할 수 있어야 하고요. 결혼해서 떳떳하게 살려고 캐나다에 왔어요. 실장님이 증인을 서주시면 저희는 결혼할 수 있어요. 형이 한국 사람 증인을 원하는 것도 한국에서는 인정받을 수 없는 관계지만 저희 결혼을 인정해주는 한국 사람이 한 사람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일 거예요.”


박진우 씨는 긴 이야기 도중 한숨을 두어 번 쉬었고, 형에 대해서 말할 때는 쑥스러운 내색도 내비쳤다. 상대가 ‘형’이 아닌 ‘그 여자’라거나 차라리 연상의 ‘누나’ 정도였다면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동성애 이야기를 들으면서 왠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주류 한인사회에서 죄악시하는 일이다 보니 나도 그 영향을 받은 것이리라. 배우자 초청 수속을 할 때는 그들의 연애 스토리를 번역해야 한다. 동성 커플 고객의 서류를 여러 번 번역해 봤기에 낯선 일은 아니었다. 핫 플레이스로 알려진 다운타운 욕빌에 가면 멋진 게이들이 잘 차려입고 거리를 활보한다. 올드 몬트리올 같은 유명 관광지에서도 보란 듯이 손잡고 돌아다니는 게이 커플들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이웃집에는 닭살이 돋을 정도로 사이가 좋은 백인 할머니 커플이 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일 뿐이었다. 자신의 동성연애 스토리를 당당하게 풀어놓는 이와 마주 앉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한의사와 치과의사 자리를 다 버리고 캐나다에 와서 산다고요?” 

“아깝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알아보니 한의사는 여기서 학원에 다니면서 면허를 받으면 침술사로 개업할 수도 있다더군요. 치과의사도 시험에 합격하면 면허 따서 일할 수 있고요. 힘들겠지만 도전해 보려고요. 저희처럼 기회를 찾아 캐나다에 오는 사람들은 그나마 형편이 좋은 거죠. 한국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게이 커플이 많아요. 이성과 결혼하는 사람도 많고 결혼 안 하는 사람은 더 많아요. 레즈비언들은… 언제나 무슨 상황에서나 여자들이 더 힘들게 살잖아요. 동성 커플도 여자들 상황이 더 힘들고 열악해요. 저도 동성애자 모임에 나가면서 알게 됐어요. 저희 커플은 상황이 좋은 축에 속하죠.”

“아… 부모님은 속상하시겠어요.”

슬그머니 그들의 부모에게 감정 이입이 되었다.

“네, 많이 속상해하세요. 그래도 엄마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시고요. 아빠도 이제는 포기 상태예요. 친형은 원래 평생 자기 멋대로 살던 사람이라서 가족 일에는 관심이 없어요. 신경도 안 쓸 거예요. 일가친척들은 부모님이 말하지 않으셨을 테니 이런 상황까지는 모르실 테죠. 그에 비해서 형 쪽은 제법 시끄러운 것 같아요. 형 부모님은 두 분 다 지방에서 교사로 일하시는데, 차라리 죽으라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대요. 창피하다면서… 형네 아버지는 형에게 한의사가 돼서 동성애 병을 고치라고 하셨대요. 그래서 한의대에 간 거라고 하더군요. 공부 열심히 해서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하면 이해해줄 것 같았다고요. 재밌지 않나요?”

‘그렇군, 그랬어. 그 부모 속이 얼마나 썩어 문드러졌을까’ 나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날 박진우 씨는 한 시간 넘게 자신의 연애사를 구구절절 풀어놨다. 저러다 나중에 지난날을 후회하게 된다면 자신들의 행동이 고스란히 상처로 남을 텐데….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얼떨결에 립서비스로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결혼식 증인을 서기로 했다. 동성결혼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으니 구경 삼아 가는 것이라 위안을 삼았다. 




토론토에 여름이 시작되는 6월, 예정대로 두 남자는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을 앞둔 어느 날 박진우 씨의 ‘형’이 한국에서 왔다. 인사차 잠시 내 사무실에도 다녀갔다. 번듯하고 남자답게 생긴 데다 깍듯한 모습까지 어디 하나 빠질 데 없이 근사한 남자였다. 박진우 씨보다 키도 컸고 부리부리한 눈매와 길쭉한 콧날, 선하게 웃는 모습, 군살 하나 없는 늘씬한 몸매까지 갖춰서 여자에게 인기가 많았을 법 싶었다. 저런 남자가 동성애자라니, 그것도 그렇게까지 지고지순하게 한 남자만 좋아하는. 잠깐 인사만 하고 돌아갔는데도 ‘아깝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도대체 뭐가 아깝다는 거야, 내가 왜 이러지’ 하면서 혼자 피식 웃었다. 내가 속물인 걸까. 

결혼식 당일인 토요일 오전은 토론토의 전형적인 초여름 날씨였다. 특별히 갖춰 입을 것도 없이 시간 맞춰 결혼식장에 갔다. 결혼식장이라고 해봐야 오래 되고 낡은 교회에 있는 작은 방이었다. 아무 장식도 없는 길쭉한 나무 의자 대여섯 개가 나란히 줄지어 있고, 너무 수수해서 꽂혀 있는 꽃마저 심심해 보이는 화병 두어 개가 놓여 있었다. 교회 건물만큼 오래된 스테인드글라스만 요란하게 화려했다. 절에 있는 탱화도 그렇지만, 스테인드글라스는 왜 그리 경박하게 화려한 걸까. 방이 환한 이유가 스테인드글라스를 타고 들어온 햇빛 덕인지 벽 장식처럼 군데군데 매달려 있는 희미한 전등 덕인지 알 수 없지만 그나마 너무 우중충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두 신랑은 맞춰 입은 듯 짙은 감색 양복에 연보랏빛 넥타이, 흰색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두 사람 모두 금방 물에서 쏙 끄집어낸 듯 말갛고 아름다웠다.


“두 사람 다 멋지네요” 하는 말이 무심결에 흘러나왔다. 인사 대신 건넨 겉치레는 아니었다. 두 남자는 “감사합니다” 하고 합창하는 듯 대꾸하더니 마주 보며 지긋이 웃었다. 박진우 씨가 증인으로 참석한 학교 친구와 그의 동거인을 소개했다. 남미계로 보이는 그들도 게이 커플이었다. 조촐한 결혼식은 주례가 식순을 정하고 진행까지 맡아서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주례에게 맡기고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나는 앉아서 자리만 지키다가 주례가 사인하라는 곳에 사인만 하면 된다. 곧 나이 지긋한 남자 목사가 등장했다. 그런데 그 뒤로 줄줄 사람들이 밀려 들어와 자리를 채웠다. 박진우 씨는 하객들과 친분이 있는 듯 눈을 맞추고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의 ‘신랑’은 다른 사람들의 참석을 몰랐는지 당황한 눈치였다. 긴 나무 의자 다섯 개에 듬성듬성 채워 앉은 사람들은 손을 잡거나 쓰다듬으면서 동성 커플임을 드러냈다. 서로 잘 아는 사이인 듯 서슴없이 농담도 오갔다. 나만 낯설었다. 나이 많은 할아버지 커플, 동양인 남자와 백인 남자 커플이 유난히 요란스러웠지만 젊은 여자 커플에게 자꾸 눈길이 갔다. ‘우리 딸 나이쯤 돼 보이는데, 부모 속 좀 썩였겠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성 커플 결혼식에 증인으로 앉아서도 여전히 찜찜하고 마음이 쓰였다.


목사가 박진우 씨 커플에게 참석자들을 소개했다. 30년 넘게 같이 살고 있는 할아버지 커플부터 막 연애를 시작한 젊은 커플까지 전부 같은 교회 교인이었다. 이 교회에 동성 커플이 그리 많은지 몰랐던 터라 놀라웠다. 오히려 모르고 있는 내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목사는 박진우 씨 커플도 소개했다. “한국에서 치과의사와 한의사였는데 결혼하기 위해서 모든 경력을 포기하고 캐나다에 온 용기 있는 커플”이라는 말이 끝나자 힘차고 요란한 환호가 길게 이어졌다. 그중 환호하지 않고 머쓱하게 앉아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내가 소수자가 된 것이었다.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덩달아 기분은 좋았다. 낡고 누추한 교회 골방이 따뜻하고 아늑한 공간이 되었다. 나중에 그 순간을 되짚어 보니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사람들의 기운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예식이 시작되었다. 잘생긴 두 신랑이 문 쪽으로 나갔다가 손을 잡고 유쾌한 척 흥겹게 걸어 들어왔다. 결혼 행진곡 같은 음악을 누군가 장난스럽게 흥얼거렸다. 두 사람이 양손을 맞잡고 마주 본 채로 목사의 주례사를 들으며 쑥스럽고 어색하게 웃었다. 신랑만 둘이라는 것 외에는 여느 결혼식과 다를 바가 없었다. 목사는 짧은 주례사 후 혼인 서약을 읽었고 한 사람씩 따라 하라고 했다. 어눌한 발음으로 실수도 하면서 두 신랑은 혼인 서약을 끝냈다. 서툰 영어 때문에 긴장하고 민망해하는 두 신랑을 아무도 조롱하지 않고 진지하게 경청했다. 나만 민망했다.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도 좋다고 목사가 말하자 기다리기라도 한 듯, 박진우 씨가 양복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더니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한국말이었다. 

“당신은 나를 사랑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구해준 사람입니다. 평생 나 자신과 남들을 속이면서 진실한 사랑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채 살다가 죽을 뻔했습니다. 죽을 때 얼마나 불행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 죽기 전에 후회하지 않고 사랑하게 해 준 당신을 죽을 때까지 사랑할 것입니다. 천국이 불행하게 살다가 죽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면, 죽어서 지옥에 가더라도 행복하게 사랑하면서 살겠습니다. 남자답게 사랑을 지키면서 살겠습니다. 사랑합니다. I love you yesterday, I love you today, I’ll love you tomorrow, and forever.”


박진우 씨는 남편 손을 잡아끌어 포옹했다. 그 방에서 박진우 씨의 말을 모두 이해하는 사람은 나와 두 신랑뿐이었다. 그러나 다른 하객들 역시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시종일관 경건하게 듣고 있었다. 마지막 문장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미리 짜기라도 한 듯 하객들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꽃을 두 신랑에게 던졌다. 결혼식의 클라이맥스였다. 박진우 씨의 신랑이 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눈물만 뚝뚝 흘리더니 훌쩍훌쩍 소리를 내다가 급기야 엉엉 울기 시작했다. 박진우 씨도 애써 울음을 참고 있었지만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 되었다. 목사는 두 신랑이 우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다가 어깨를 다독여 위로하고는 결혼식을 계속 진행했다. 준비된 실반지를 서로의 손가락에 끼워 준 후 목사의 성혼 발표가 이어졌고, 드디어 결혼식이 끝났다. 박진우 씨의 신랑은 내내 훌쩍훌쩍 울었다. 큰 키에 남자답게 생긴 신랑은 낯선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눈치도 보지 않고 울었다. 분위기에 동화된 하객 중 몇 명도 눈이 벌게져서 콧물을 찍어냈고 나이 많은 할아버지 커플은 남들이야 울거나 말거나 시종 즐거웠다.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어깨까지 들썩이며 흥겨워했다. 이번에도 나만 낯설었다. 나처럼 이리저리 눈치 보면서 남들 눈을 속여야 하는 사람은 울고 싶을 때 울지 못하고 웃어야 할 때도 마음껏 웃지 못하다가 푸석푸석 메마른 나뭇잎 같이 늙어갈 수밖에. 자기감정에 솔직한 그들이 부러웠다. 경건하지도 않고 격식 따위 신경 쓰지도 않는 어설픈 결혼식은 금방 끝났다. 여전히 훌쩍거리는 두 신랑이 성혼 서식에 사인을 하고 나도 증인 사인을 했다. 하객들이 축하하며 포옹을 나누었다. 다 같이 요란하게 사진을 찍었다. 낯설고 어색한 그들 틈에서 나도 배경 인물이 되었다. 


부모 ⋅형제가 모여 축복해 주는 결혼식이었다면 요란하게 피로연도 했겠지만, 금전적⋅정신적 여력이 없는 두 신랑은 하객들에게 음식을 준비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전했다. 토요일 오전, 금쪽같은 시간을 쓰면서 할 일을 다 한 하객들은 들어올 때처럼 줄지어서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몰려나갔다. 그들은 손을 잡고 어딘가에 가서 시시한 브런치를 먹거나 산책을 하거나 쇼핑을 하면서 남들 눈치 보지 않고 행복할 테지. 두 신랑은 방금 결혼식을 끝낸 사람들 같지 않게, 마치 연극 공연을 마친 배우들처럼 곧바로 일상으로 돌아왔다. 너무 많이 울어서 그런지 따끈한 국물이 있는 밥을 먹고 싶어 하기에, 내가 좋아하는 한인 타운의 허름한 순댓국집으로 안내했다.


“실장님, 성경에 먹지 말라는 것이 많잖아요. 그중에 돼지고기와 동물의 피가 있어요. 돼지 피로 만드는 순대는 두 가지가 다 들었잖아요? 한국 기독교인들은 먹지 말라는 것은 먹어도 되고 짓지 말라는 모든 죄는 다 짓고 살면서 동성결혼은 큰 죄악이라며 입에 거품을 물어요. 어떤 때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어떤 때는 시대나 상황에 따라서 자기 멋대로 해석하죠.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어떻게 문자로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성경을 문자 그대로, 기계적으로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구원도 문자로만 받을 겁니다. 예수를 믿고 따라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확신은 저희 같은 동성 커플일지라도 다르지 않아요. 저희가 하는 것이 증오가 아니고 사랑이잖아요. 저희를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실장님이 한국 사람을 대표해서 저희 결혼을 인정해주신 겁니다. 저도 진우가 말한 것처럼 남자답게 이 사랑을 지키겠습니다.”


박진우 씨의 남편이 벌건 눈으로 쑥스럽게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낯간지러운 이야기였지만 진심이 느껴졌다. 의도하지 않게 나는 한국 사람 대표가 되어 그들의 결혼을 인정했다. 그럴 자격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자도 사랑을 지킵니다. 사랑을 지키는 게 남자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요? 여자도 여자답게 사랑을 지킵니다” 하고 웃으면서 말했더니 “그럼 인간답게, 사랑을 지키겠습니다” 하더니 서로를 지긋이 바라봤다. 

‘예쁜 사랑이구나…’ 불현듯 그들의 사랑을 인정하게 되었다. 차별받지 않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고, 이왕이면 치과의사 면허도 따고 한의사도 돼서 이민생활도 성공하길 바란다고 ‘꼰대’처럼 조언했다. 돼지 피가 듬뿍 들어간 순댓국이 맛있었다.


2년 전, 박진우 씨 부부는 토론토에서 차로 4시간쯤 떨어진 북쪽 마을로 이사를 갔다. 그곳에서 치과의사 면허 공부를 하면서 여느 신혼부부처럼 알콩달콩 살았다. 그러던 중 드디어 시험에 통과했고, 나에게 연락한 것이었다. 가끔 두 사람 사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내주고 소식도 전하더니 어느 날부터 연락이 끊겨 궁금하던 차였다. 한국인이 캐나다 치과의사 면허를 받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데, 얼마나 열심히 매달렸으면 그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었을까. 대단한 사람이다. 박진우 씨 남편도 침술사로 동네에서 인기가 좋다고 한다. 


박진우 씨는 아직 영주권을 받지 못했다. 영주권 제도가 어려워진 탓도 있지만 이 방법 저 방법 기웃거리지 않고 ‘급행 이민’이라는 연방 이민제도만 고집하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지원자의 모든 스펙을 점수로 계산해서 상대평가로 자격을 부여하는 제도다. 30대 중반에 접어들었으니 나이도 적지 않고, 박진우 씨 신랑의 캐나다 경력이 짧고 영어 점수가 높지 않은 것이 걸림돌이었다. 결혼을 먼저 하지 않고 박진우 씨 혼자 영주권 신청을 했다면 더 수월했겠지만 사랑이 먼저였던 두 남자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제 비자 연장이 문제다. 이번에는 박진우 씨 남편이 칼리지에 가기로 했다. 그러면 앞으로 5년 정도의 시간이 다시 주어진다. 영주권 제도가 자주 바뀌는 캐나다에서 마음 편하게 살려면 하루라도 빨리 영주권을 받아야 한다. 박진우 씨가 치과의사 면허를 받았으니 영주권 자격 점수가 올라갈 것이다. 벌써 캐나다에서 일한 경력도 2년이 넘었으니까 그 점수도 좋을 것이고. 나이가 점점 많아진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괜찮다.


그들이 사는 모습을 3년간 전해 들으면서 게이나 레즈비언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그 들 삶의 증인이 되었다. 이해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해할 필요 없이 인정하면 그뿐이다. 세상의 모든 사랑을 다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이해하고 싶다. 양반과 상놈이 결혼할 수 없었던 고리짝 시절 이야기는 제쳐 두고, 고작 몇십 년 전만 해도 미국에서는 흑인과 백인이 결혼하는 것도 범죄였다. 지금은 오히려 차별금지법이 생겨서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이 벌을 받는다.


 생각이 바뀌어서 법이 바뀐 것인지 법을 바꿨더니 생각이 바뀐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사는 모습이나 생김새, 혹은 생각이 다르다고 누군가를 차별한다면 나를 지켜줄 것이라 믿는 정의는 어느 날 나를 배반할지도 모른다. 박진우 씨 부부 덕에 세상 보는 눈이 달라졌다. 세상이 바뀌어 가는데 내 생각도 바뀌는 것이 당연하다. 박진우 씨 부부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나 같은 무식쟁이에게 오해받고 차별받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야 얼굴 노란 아시아 여자도 백인이 기득권인 나라에서 기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소수자도 기죽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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