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또래의 사람들은 노래가 흥얼거려지는 인트로를 차용했다. 정말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서 출근하는 시간 동안 유튜브를 보거나 책을 읽는다.
그전에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할 때도 콘텐츠를 틀어놓고 자기 전 마지막 순간까지 영상을 보다 잠든다.
유튜브 구독 채널만 300여 개가 넘고 온갖 정보들을 빠르게 흡수하기 위해 모든 콘텐츠에 배속을 걸어서 본다.
유익하고 깨달음이 있는 정보성 콘텐츠뿐 아니라 심지어 예능이나 드라마에도 항상 배속을 적용한다. 매일 저녁 8시 뉴스를 헤드라인 위주로 5~10분 만에 보고 즐겨보는 예능도 요약본이 유튜브에 올라오면 본다. 새벽 뜬 눈으로 실시간 중계를 보던 스포츠 경기들도 이젠 그저 몇 분 하이라이트로 보게 되었다.
몇 년 전 IPTV를 해지하고 오로지 내 의지와 희망으로 내가 보고 싶은 콘텐츠를 내가 보고 싶은 시간에 본다.
이 모든 것이 같은 시간에도 많은 인풋을 넣기 위함이고 이렇게 많은 콘텐츠를 소화하는 것이 나의 삶을 다채롭고 풍요롭게 해 준다는 믿음 때문이다. 흘러가는 시간에 여러 발자국을 남기는 느낌이 든다.
다만 언젠가부터 헤비 콘텐츠 소비자가 되어 나 스스로의 온전한 시간들을 지배하게 되고 꼭 봐야 할 콘텐츠와 그냥 콘텐츠를 보는 시간에 알고리즘으로 노출되는 콘텐츠를 생각 없이 소비하는 것이 혼재되기 시작했다.
주체적으로 콘텐츠를 소화한다는 것은 인풋만큼이나 아웃풋을 도출한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지는데 난 어느 순간부터 아웃풋 도출 없이 인풋만 늘어나는 순수 콘텐츠 소비자가 되었다.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에 대한 나의 생각과 담론을 어디엔가 담아 새로운 콘텐츠로 생산하는 일이 결여된 삶 속에선 그저 콘텐츠에 잡아먹힌 인간으로 살아가질 뿐이다.
그나마 지금 하고 있는 여러 독서모임에서 소비한 콘텐츠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시간이 같은 내용에 대한 다른 견해를 들음으로써 사고의 폭을 확장하는 의미 있는 시간으로 탈바꿈하는 것과
매주 한 번 회사에서 쓰는 업무 관련 글과 매일 아침 글쓰기를 통해 흩날리는 생각들을 담아 기록해 두는 일이 나에게는 콘텐츠 생산과정이다.
콘텐츠를 생산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콘텐츠를 소비하는 시간이 줄어들게 됨에 따라 콘텐츠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이 해소되고 비로소 나는 콘텐츠 의존적인 삶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글이든 말이든 영상이든 결국 균형감 있는 생산과 소비가 있을 때야 비로소 나의 온전하고 주체적인 삶을 지탱해 줄 단단한 신념과 기둥이 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