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4
달리기를 시작한 지 5년 반 만에
드디어 서울 마라톤 (동아마라톤)을 뛰게 되었다.
작년 대회에서 급수대 자원봉사를 하면서 골인 지점 직전의 러너들을 목도하며
내년엔 이 주로에 내가 달리고 있으리 생각했었는데,
그날이 벌써 오늘이 되었다.
사실 그동안 제마나 춘마만 뛰었던 이유는 아무래도
여름에 훈련하고 가을에 완주하는 패턴의 반복이
동계훈련보다는 수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작년 데상트 델타프로 2기가 끝난 12월,
문득 이제 처음으로 동계훈련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던 것 같다,
그때 우연히 접하게 된 JUDY 러닝클럽을 신청하게 되었고,
14주간의 매주 토요일 훈련과 매일의 러닝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춥고 바람이 불고 뛰기 싫었던 순간들을 이겨낸 하루하루를 쌓아갔다.
어제 마지막 훈련을 마치고 나니 괜스레 울컥해지면서
동계 시즌을 잘 버텨 준 스스로에게 칭찬을 건넸다.
처음 해보는 약간의 카보로딩과
대회 전 날 포카리 스웨트 1병과 옥수수콘 1캔 섭취
그리고 어떻게든 일찍 잠들기 위해 낮잠을 자지 않았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목욕재계하고 어제 준비해 둔 옷가지를
하나하나 주섬주섬 입으며 각오를 다졌다.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으로 향하는 길,
2년 전 제마에서 비를 맞으며 처음 서브 4를 했던 그날을 떠올리며
하늘에 계신 아빠와 함께 달리게 해달라고 되뇌었다.
그렇게 도착한 광화문에서 서둘러 짐을 맡기고 나서는
몸을 풀기 시작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강수량이 적었고
몸을 풀다 보니 점점 흥분되기 시작했다.
지난 세 번의 마라톤을 어제 복기하면서
초반 1시간 이내에 심박수가 170을 치고 올라가
극한의 레이스를 펼친 것을 염두에 둔 나는
오늘은 절대로 초반 5km에서 오버페이스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고
3시간 30분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매 km 4분 59초 이내를 유지하자는 생각뿐이었다.
가민 포러너 255 뮤직으로 시계를 바꾼 뒤에는
핸드폰 없이도 노래를 들으며 달릴 수 있었기에
오늘은 한결 가벼운 몸으로 영감을 주는 플리를 들으며
초반 10km를 4:56 정도로 잘 절제하며 달렸다.
광화문에서 10년간 일했던 나로서는 20km까지 뛰는
꼬불꼬불 을지로, 청계천, 종로가 고향 같은 느낌이 들어 편안했고
들이치는 비도 그저 하늘에서 뿌려주는 미스트처럼 느껴졌다.
10km 부근에서 우비를 벗어던지니 몸과 우비 사이에 고여있던
땀들이 흩날리며 갑자기 추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초에 벗으려고 했던 팔토시와 장갑은 그대로 끼고 달리기로 했다.
20km까지 생각보다 어려움 없이 4:55 정도로 달리고 있었고
심지어 심박수도 140 중반에서 150 사이를 유지하고 있어서 신기했다.
작년 춘마 때 15km부터 포기하고 싶었던 걸 생각하면
아주 준수한 상태였고 나도 모르게 러너스 하이가 온 25km 부근에선
결승선에서 GD의 Too Bad 춤을 추며 들어갈까?라는 잡생각까지 들었다.
너무 고통스러운 레이스를 하던 작년 춘천과 달리
30km 까지는 그저 달리는 이 순간을 즐기자는 마음과 함께
그간에 쌓아 온 훈련들, 보통의 하루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임에
인생으로 비유되는 마라톤처럼 매일 하루를 충실히 살면
무엇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파워 N과 F의 조합으로
또 한 번 뭉게뭉게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는 순간이 지나고
30km 부근부터 신기하게 진짜 마라톤이 시작되었다. ㅎㅎ
갑자기 페이스가 5분대로 가기 시작하는 걸 느낀 순간
사점을 극복하는 2분간의 짧은 피치 주법을 사용하여
어떻게든 처지지 않고 페이스를 5:01 내로 다잡았고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성수, 구의동 구간을 지나
이제 잠실 롯데타워가 보이는 잠실대교에 들어섰다.
풀코스를 뛰다 보면 실제 달리는 거리는 42.195km보다
2~300m는 더 길어지는 것을 알기에 남은 거리와 지금의 페이스로
최종 기록을 예측해 보니 정말 아주 간당간당하게 3시간 29분과 30분 사이가 될 것 같았다.
그때부터는 329를 못하고 330을 했을 때의 좌절감을 생각하며
무조건 집중해서 남은 4킬로를 457로 달려낸다! 다짐했다.
마지막으로 팔토시와 장갑을 벗어던지고
대교의 맞바람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과 섞여 달리기 시작했고
그렇게 잠실대교를 지나 내리막으로 들어서면서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심박수는 이상하게 더 떨어져서 130 후반을 기록하고 있었고
그저 엉덩이 근육과 왼쪽 발목이 아파서 속력을 더 낼 수 없었을 뿐이다.
Shut up ankle!, hip! 을 외치며 마지막 지옥의 2km 구간을 달릴 무렵
작년 급수대 봉사하던 곳을 지나면서 1년 간 나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체감했다.
달리기를 5년 간 하면서 풀코스를 도전할 거라 생각지 못했었는데
3번의 완주를 하고 그 완주 때마다 참 힘들고 또 힘들어서
다시는 풀코스를 뛰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는데
정말 제대로 풀코스를 준비한 첫 마라톤이라고 할 수 있는 이번 동마에선
그동안 매달 250에서 300km 정도의 마일리지를 6개월 정도 쌓아온 것이
이토록 페이스를 일정하고 심박수를 안정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뛰는 내내 순간을 즐기고 있다는 생각에,
그동안의 나의 마라톤은 참 준비가 안되고 욕심만 가득했었구나 느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왠지 앞으로 더 열심히 달리기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근런 (20km)을 밥 먹듯이 하고 매달 4~500km를 달리게 된다면
꿈의 기록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보스턴 마라톤을 뛸 수 있는 기회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결승선이 1km도 남지 않았을 때,
갑자기 가민 시계가 배터리 방전으로 꺼져버렸다.
추운 날씨에 더해 가민으로 연결해서 음악을 계속 듣다 보니 배터리가 더 빨리 닳았던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시계 없이 남은 거리를 몇 분 내로 달려야만
329를 할 수 있을지 막막해졌다.
아니 진짜 이게 무슨 일이람..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남은 힘을 짜내 달려보자!! 는 생각으로
결승선을 향해 우회전!
집 앞이 결승선인 축복 덕에 응원을 나와있는 가족들을 두리번거리고 찾아서
사랑하는 딸의 이마에 뽀뽀를 한 뒤
마지막 100m 질주해서 골인!!
그렇게 내 기록은 모른 채로 엄습해 오는 추위에
오돌오돌 떨리는 몸으로 물품보관소까지 직진을 한다.
그러면서 속으로 정말 잘했다. 대견해. 자랑스러워.
그간의 열심히 달려온 나 스스로를 칭찬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마음과 함께 가방을 찾고 환복을 한 뒤
핸드폰을 켜고 기록을 확인한 순간 3:29:17!!
정말 할 수 있을까 걱정만 가득했던 329를 달성한 순간이었다!!
우리나라 3대 메이저 마라톤 동마, 제마, 춘마 모두 완성한 순간이자
처음으로 풀코스 마라톤을 뛰고 나서도 결승선에서 쓰러지지 않았고
앞으로 더 열심히 훈련하고 더 많이 감량해서
진짜로 더 잘 달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마라톤이 되었다.
달리기가 그저 다이어트나 건강 또는 기록에 얽매이는 수단이 아니라
달리는 순간 그 자체로 의미와 즐거움을 주는 나의 동반자가 되었다는 생각에
달리기의 본질적인 가치를 생각하며 러닝 자체를 즐길 수 있는 러너가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참으로 뜻깊고 의미 있는 나의 4번째 풀코스 마라톤 완주를 해낸 날
저녁 6시 무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