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무도 읽을 것 같지 않은 이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2024년 12월 3일에 일어난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으로부터 촉발된 시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소수자들과 함께하는 연대와 사회복지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었다. 지금도 시위가 진행 중이지만, 그 과정을 생각해 보면, 윤석열 정부의 "더 이상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라는 말로 대표되는 혐오가 차별이 소외된 사람들의 연대로 바뀌는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야 말로 사회복지가 원하는 이상적 사회가 아닐 수 없었다.
사회복지를 공부하면서 학부에서 아마 가장 들었을 말은 '클라이언트의 삶의 질 향상'일 것이다. 클라이언트는 사회복지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의미하고,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 사회복지 서비스를 제공하여야 한다는 의미였다. 사회복지의 클라이언트는 과연 누구일까? 노인복지관을 이용하는 어르신?, 종합복지관에서 반찬을 지원받는 수급자? 물론 맞다.
그런데, 사회복지사가 삶의 질 향상을 목표로 한다면 필연적으로 인권전문직일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사회에 소외되어 있는 소수자들도 클라이언트라고 판단하여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그저 우리의 울타리 안에만 갇혀있는 사람들만의 사회복지의 범주 안에 들었다고 판단할 것인가. 나는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사회복지가 진정으로 소수자들을 위해 사회정의 실현에 제 역할을 다하였는가. 서비스의 영역을 떠나서 말이다. 우리는 그저 체제에 순응하고 잇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반대로 사회복지는 소수자들을 억압하는 정당화의 근거로 작용하고 있는지 모른다. 최근 장애인의 탈시설에 관한 논의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 논의는 장애인을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그 삶의 주체로서 살아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요구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 시설과 장애인 간의 관계에서 시설에 근무하는 사회복지사는 사회복지 전문가임과 동시에 인권전문직으로서 다양한 맥락이 있었다 할지라도 장애인의 인권침해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하게 된다.
나는 장애인을 시설 수용하는 것에서 탈시설의 논의까지 이어진 것이 단순히 사회복지의 발달 과정에 있다고 이해하기보다는 기존의 사회복지 담론이 장애인들의 권리를 옹호하기보다는 사회에 순응하는 방식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라고 이해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에서 사회복지의 역사가 짧고 특히, 권리 중심의 사회복지라는 개념 자체가 오래되지 않았다 치더라도 학문과 실천의 영역에서 과거에 대한 자성을 하지 않으면 사회복지라는 학문과 사회복지사라는 전문적 직업에 대한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본격적인 글에서는 사회복지를 권리를 중심으로 이해해 보고, 사회의 변화에 따라서 사회복지가 발달한 과정을 알아보고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탈정치화되어있던 사회복지가 다시 정치의 영역으로 와야 하는 이유와 '선성장 후분배'로 여겨졌던 일종의 '나중에' 관념을 탈피하고 더 나은 사회로 발돋움하는 사회를 한번 빈약하게나마 그려볼 것이다.
사회문제의 근본적인 해결 없이는 복지 현장에서는 분명히 한계가 있고 그로 인해 사회복지사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있다. 사회복지사를 비롯한 많은 사회복지 종사자들이 그 현장에서 최선을 다한다. 그럼에도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사회문제들에 있어서 절망감이나 허무함을 느끼면서 소진되는 것이 사회복지의 큰 문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나는 사회복지종사자가 자신의 직업에 대한 고통 때문에 일을 그만두거나 자살하는 일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기를 원할 뿐이다.
이 글은 사회복지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필자의 능력의 한계로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글이 주목받아야 한다고 할 이유가 있다면, 우리 사회가 연대를 중심으로 한 변화의 때에 있고, 이것은 사회복지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