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지주의에 저항하며
https://n.news.naver.com/article/037/0000036573?sid=101
오랜만에 참 괴로운 기사를 보았다. "빈곤층이 차상위 계층보다 잘 사는 복지를 피해야"라는 말로 시작하는 긴 쓸모없는 말들의 연속이었다. 특히나 기초생활수급자를 빈곤층이라고 정의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차상위 계층보다 잘 살게 해서는 안된다는 이 말도 안 되는 주장은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대상자들을 계급적 하층민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끔찍한 일처럼 여겨졌다.
이 사람은 부유한 자신의 돈을 빌려준 다른 사람이 비빔밥을 골랐을 때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사람은 사회복지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이다. 사회복지는 이 기사의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사람의 이야기처럼 시혜나 동정에 의한 원조가 아니다.
사회복지에는 사회보험, 공공부조, 사회서비스가 있고 기초생활보장제도는 공공부조로 국가가 시민의 일정 수준 이상의 생활을 보장을 위해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우리가 시혜나 동정으로 누군가를 원조하는 게 아니라 당연히 받아야 하는 권리이다.
그리고 차상위 계층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일반적으로 차상위계층은 기준중위소득 50% 미만의 사람 중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되지 못한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한국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지원 내용을 살펴보면 50%까지를 보장한다. 그러니까 소득 이외에 다른 내용에서 떨어졌을 확률이 큰 부분이다. 이들을 두고 빈곤층이 아니라는 식의 논리는 곤란하다. 오히려 사각지대를 줄이고 보편복지를 지향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의 기사도 나오는 시대인데, 내 자리 하나가 없는 게 원통할 따름이다. 글 기고자는 부끄러운 줄 아시길 바란다. 이런 식의 반복지주의는 이제 먹히지 않는다. 기초생활수급자는 계급적 하층민이 아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우리와 똑같은 한 명의 사람이다. 당장 몇 개월 전에도 복지를 받지 못해서 사람이 죽었고, 고등학생 세 명이 같이 뛰어내렸다. 그리고 10대 자살률이 높아지고 있다.
2025년 기준 1인가구 생계급여 선정기준은 76만 원 남짓, 이 돈은 절대 넉넉한 돈이 아니다. 기사의 마지막엔 이런 문장이 나온다.
" 그래서 ‘지원’을 한다는 건 높은 수준의 기술이 필요한 일이다. 예기치 않은 희생자를 만들지 않으면서 누군가를 지원한다는 건 정말 쉽지 않다. 대다수 나라에서 최하위 계층에게 최소한의 지원만 하는 건 이 때문이기도 하다. 빈곤층을 지원하다가 차상위 계층보다 더 잘살게 되면 정말 곤란해진다."
대다수의 나라에서 하는 최소한의 지원이 우리나라보다 지원 수준이 높은 것은 알고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식이면 굉장히 곤란하다. 한국이 공공부조가 굉장히 취약한 나라인 것은 아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한국의 빈곤층은 절대적 빈곤이 아니라 상대적 빈곤을 중심으로 본다는 것도. 그리고 차상위계층도 빈곤층에 속한다는 것을..
이런 기사가 나오게 하는 언론이 참담하다. "아무리 그래도"라는 말이 계속해서 무너진다. 사회복지는 진보의 개념이 아니라는 말이 떠오른다. 사회 체계를 유지시키기 위한 보수의 협상, 이런 말이. 동아는 무엇인가. 극우의 스피커, 아니 어쩌면 국가의 해체를 바라는 아나키즘적 언론인가? 국가의 존재이유를 부정하는 기사를 냈다.
기초생활수급자는 자신들이 잘못하거나 무능해서 되지 않았다. 사회가 그들을 보호하지 못한 것에 가깝다. 이건 이미 학계에서 증명된 사실이다. 설령 이것에 동의하지 않아도 이들은 죄인이 아니다. 이들을 죄인 취급하거나 이들을 쓸모 없는 취급하면 정말 곤란해진다. 12.3 계엄 이전 부터 있어왔던 반복지주의에 동조하지 말도록 하자. 사회복지에는 아직 계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