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극우의 역사
이승만 정권은 반공을 국가 운영의 핵심 기조로 삼았다. 그는 1948년 국가보안법을 제정해 정치적 반대 세력 11만 4천여 명을 구속했다. 심지어 친일 행위를 저지른 자들이 ‘반공’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무력화했다.
6.25 전쟁 시기에는 ‘부역자 색출’을 명분으로 수많은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졌고, 전쟁 후에도 반공을 내세운 공안통치가 계속되었다. 박정희 군사정권 역시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며 유신독재를 정당화했고, 국민들에게 반공교육을 강요하며 정권에 대한 충성을 요구했다. 그는 중앙정보부를 앞세워 반정부 인사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탄압했고, 긴급조치 9호 등을 활용해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약했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북한군 개입설과 결부시키며 학살을 정당화했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과정에서 ‘공산 세력 척결’이라는 논리가 적극 활용되었다. 심지어 김대중 전 대통령마저 공산주의자로 몰려 사형이 선고되었다.
‘반공’이라는 명분 아래 자행된 이 같은 탄압과 폭력은 결국 국민의 삶을 옥죄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와 더불어, 반공주의를 강조한 독재 권력은 필연적으로 외세, 특히 한미동맹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국민적 지지를 얻지 못한 독재 정권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냉전 시기 미국의 기본 정책이 반공주의였기에, 한미동맹은 단순한 군사적 협력을 넘어 사실상 반공동맹으로 작동되어 왔다.
최근 미국이 신냉전 질서를 구축하면서 다시금 반공을 강조하고 있다. 윤석열 정권은 이에 편승해 반공주의를 앞세우며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 특히 12.3 비상계엄 선포 시도는 반공을 명분 삼아 국가 위기를 조장하고 군사적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시도였다.
결국, 반공주의는 독재 권력이 국민적 지지를 상실했을 때 이를 대체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으며, 한미동맹은 반공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 구조로 기능했다. 오늘날에도 반공주의는 여전히 정치적 도구로 악용되고 있다. 내란수괴 윤석열은 정부 출범 초기부터 ‘공산전체주의’, ‘종북좌파‧반국가세력’ 등을 운운하며 반공 프레임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런 반공 이념의 강화는 단순한 레토릭이 아니라 실질적인 권력 장악 전략과 맞물려 있었다.
(2) 한국의 보수화
한국은 지난 15~20년간 주관적 계층지위가 높아졌다. 주관적 계층인식이 단기간에 크게 높아진 경우를 한국 이외에 살펴보기 어렵다. 시민의 주관적 계급 지위가 높아진 구성효과가 모두 보수화의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한국에서 자신을 상층으로 여기는 정도는 청년층과 장년층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객관적 위치가 동일한 상태로 통제하면, 실제 위치 대비 자신의 위치를 상층이라고 인식하는 정도가 중년층이나 노년층보다 청년층에서 강하다. 거기에 20대 남성은 자원 배분의 원칙으로 평등보다는 능력에 따른 분배를 선호한다. 그러니까 20대 남성은 자신이 경제적 약자라서 재분배로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상층인데,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받지 못하고 재분배 때문에 뺏기고 있다고 여길 가능성이 높다.
청년 남성은 이준석이라는 중핵이 있고, positive 이데올로기인 능력주의와 negative 이데올로기인 반페미니즘이 모순 없이 결합하고 있고, 소집단인 온라인 모임이 이데올로기적 일관성을 유지하는데 친화적이다. 이에 반해 여성은 중핵이 없고 페미니즘과 능력주의라는 상황에 따라 모순될 수 있는 두 가지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고, 소집단 모임이 이데올로기적 일관성을 유지하기에 비효율적이다.
따라서 청년층에서 여성에 친화적인 진보 진영의 기반이 더 불안정하다. 정치적 선택에서 집토끼를 공고히 하지 않으면 상대적으로 쉽게 위기를 맞이할 수 있다. 세대 단위로써의 공고성이 남성보다 여성이 낮기 때문이다. 호남의 민주당 지지가 흔들릴 때 김대중 대통령이 했던 조언이 전통적 지지층 회복이라는 집토끼 우선 정책이었다. 집토끼의 지지 없는 확산 정책은 양자를 모두 잃을 가능성을 높일 것이다.
(3) 혐오로부터의 저항
한편 이와 같은 논의에서 벗어나 보수와 진보에 관점을 제외하고 인권적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할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혐오세력과의 대립 내지는 극우세력으로 대표되는 교회 세력과 시민사회 간의 대립과 인권적 측면에서의 권리 회복일 것이다. 진보와 보수를 벗어나 모든 인간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권리를 가진다는 인권적 가치는 그 자체로 정치적 논쟁의 문제 이긴 하지만 혐오할 권리나 차별할 권리 같이 실존하지 않는 권리보다 우선시되며, 우리가 당면한 과제이기도 하다.
박정혜와 고진수의 고공농성이나 장애인 이동권, 탈시설과 같은 문제에서부터 이주노동자 차별 철폐운동, 서울시립십대여성건강센터 폐쇄나 서울사회공공서비스원 폐쇄 문제 등, 이러한 문제는 그들의 과제가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과제이며 ‘우리’의 과제인 것이다.
(4) 사회복지와 사회운동
이러한 과정 속에서 사회복지사를 인권전문가로 천명하는 추세에서 인권과 사회복지는 동반자적 성격을 가진다는 김기덕의 고찰처럼 사회복지는 이러한 시민사회, 노동, 인권 운동과 궤를 같이해야만 한다.
최근 광장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다시 대두되고 있다. 광장에 선 많은 사람들은 ‘연대’와 ‘투쟁’을 기점으로 다시 사회를 바꿔나가고 있다. 특히, 이 가운데에 우리 사회가 지웠던 많은 소수자들의 존재가 부각되고 있다. 그리고 이 연대는 장애인을 향해, 여성을 향해, 노동자를 향해 뻗어 나가고 있다.
복지국가는 단순히 사회정책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정치적·경제적으로 다층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이해하여야 한다. 사회적·정치적인 합의를 걸쳐서 자본주의의 연장선으로 복지국가를 선택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지속 가능성은 노동력의 지속적인 재생산에 기초하고, 복지국가의 지속 가능성은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에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성공한 복지국가라고 여겨지는 서구 복지국가를 살펴보면 새로운 사회위험에 대응하기 위해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돌봄 노동을 사적 영역에서 공적영역화 하게 되는 것과 노동의 주체였던 남성이 실직을 하는 등의 이유로 위험에 처했을 때 국가가 이에 따른 지원을 하는 것 각각 탈상품화, 상품화의 과정을 겪게 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성별 분업의 해체를 요구받으면서 노동 재생산에 참여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젠더론적 관점에서만 적용되지 않으며 모든 소수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정의 주체'로 작용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젠더의 개념에 조금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Gender는 사회·문화적으로 만들어진 성이고 이것과 관련한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것은 인위적인 결과이다. 그러므로 성불평등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모든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고, 우리의 인위적 행위가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5) 함의
복지국가에서 불평등과 차별에 관한 논의는 다중 복합적이고 교차적인 성질을 띄게 되는데 이를테면,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이 겪는 불평등의 값이 같지 않다는 것을 예시로 들 수 있다. 백인 여성에게 가해지는 불평등은 '여성'이라는 것이라면, 흑인 여성에게 가해지는 불평등은 '흑인'이라는 점과 '여성'이라는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복잡한 불평등을 잘 해결해 내야만 성공한 복지국가가 될 수 있다.
한국은 어떨까? 하나의 예시지만 2013년 박근혜 정부의 출범과 함께 실시되었던 '아동양육수당'정책을 들여다보면, 그 대상을 보육시설을 이용하지 않는 자녀를 둔 모든 가구로 확대했다는 점에서 복지급여의 보편주의적인 확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복지국가의 관점에서는 이 정책이 전통적인 성별 분업을 강화하는 반성평등 정책이다. 이 밖에도 한국은 높은 유리천장 지수, 성별 임금격차, 성소수자 소외문제, 경제불평등, 장애인 차별 문제 등등의 불평등을 좀처럼 해소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복지국가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번 광장에서의 상반된 모습은 한국의 복지국가의 여정에 있어서 큰 변환점이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어쩌면 설레발일지 모를 미래를 상상하는 일이야 말로, 사회복지가 해야 할 본연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느 사회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어떻게 우리의 정치권력을 쟁탈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여겨진다. 우리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또,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