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구는 직접 챙겨라!

[2023 안전 책임사회]

by 이건

예전에 국회나 정부종합청사 공청회에 가보면 행사를 시작하기 전 참석자를 위한 비상구 안내를 해주지 않았다. 심지어 세미나 주제가 안전에 관한 것이었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도 지켜지지 않은 무늬만 안전 공청회였던 것이다.


몇 해 전부터 노래방이나 영화관에서도 비상구 안내방송을 해 주는 등 일부 긍정적인 변화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안전의 원칙이 무시되는 경우는 생활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학교수업을 시작하기 전, 종교집회가 시작되기 전, 재판을 시작하기 전 그리고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참석한 사람들을 위해 비상구 위치를 안내해 주는 곳은 과연 얼마나 될까?


매번 대형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우리는 한 목소리로 안전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가 생각하는 안전이라는 것은 실천이라는 소프트웨어는 배제한 채 오로지 기반시설이나 장비와 같은 하드웨어적인 시스템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 보인다.


이런 상황은 스포츠 경기가 펼쳐지는 대회장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 번은 국제 배드민턴 대회가 열리는 도중에 화재경보가 울렸지만 무슨 영문인지 몰라 당황하는 선수와 관계자들에게 아무런 안내방송도 해주지 않았다.


그저 시설을 담당하는 직원 두 명이 문제가 될 만한 곳을 찾아다니며 확인하고 있었을 뿐이다. 다행히 화재경보의 원인이 시스템 오작동으로 확인되었지만 만약 진짜 화재였다면 국제대회를 개최해 놓고 어설픈 대응을 한 모습이 두고두고 전 세계에 회자될 뻔했다.

또한 세계사격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던 한 대회장에서는 출입구 반대편에 위치한 비상구를 잠근 채 경기를 개최하기도 했다. 왜 그런지 묻는 질문에 외부인이 몰래 들어올 수 없도록 출입을 통제한 것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지만 정작 대회에 참가한 선수와 자원봉사자 그리고 대회 관계자 모두에게 별다른 안내는 없었다.


또 다른 아찔한 상황도 기억난다.

서울에서 소방관으로 근무할 당시 주일 오후 교회 식당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적이 있었다. 소방차 여러 대가 화재를 진압하고 있었지만 화재가 발생했던 식당 위층에서의 예배는 중단되지 않았다.


가연물(Fuel), 산소(Oxygen) 그리고 점화원(Heat) 등 3가지 요소가 갖춰지면 발생하는 것이 화재다. 예배를 중간에 중단하는 것이 결코 잘못된 행위는 아니며 단순히 기도와 믿음의 크기로써 화재를 진압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28년 간 소방관으로 근무하면서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상황을 둘러보다 보니 불안감이 커지는 것은 사실이다. 이제는 직접 내 눈으로 비상구의 위치를 확인하고 또 내 손으로 비상구 문을 열어봐야 안심이 될 정도다. 다른 사람이 안전하다고 하는 말조차도 신뢰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화재, 지진, 테러 등 재난 상황에서 우리를 지켜줄 또 다른 생명의 문이 바로 비상구다. 비상구는 사람이 건물에 거주하는 동안에는 결코 잠가서는 안 된다. 만약 필요에 의해 몇 개의 문을 잠그는 경우에도 건물 내부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전에 안내를 해 주고 또 다른 비상구가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재난이 발생하고 난 후 받은 피해를 국가에 호소해야만 하는 상황은 매우 슬픈 일이지만 안전하지 못한 시스템을 안전할 것이라고 믿는 상황은 대단히 우려스럽다. 왜냐하면 그동안 목격했던 현장의 우선순위는 안전이 아닌 경우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안전은 실적이라는 정량적 평가의 틀속에 가두어 바라볼 수 없는 영역이다. 업무 자체가 고되고 막강한 권한도 없다 보니 현장에서 융통성이란 이름으로 쉽게 타협하고 무사안일주의라는 유혹에도 빠질 때도 많다.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는 보이는 것을 그냥 보이는 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안전이란 것을 한 겹 들춰내고 꼼꼼히 살펴보면 그럴싸하게 흉내만 낸 액세서리와 같은 안전도 제법 많기 때문이다.


언젠가 주한 미 공군 오산기지 병원에서 화재 대피훈련을 한 적이 있다. 화재경보가 울리자 입술을 꿰매던 미군 의사와 환자가 수술 도중에 실과 바늘이 입술에 매달린 상태로 건물을 대피했던 장면은 지금 우리의 안전의식이 어느 수준으로까지 높아져야 하는지 그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 같다.


외국에서 바이어가 방문했을 때 비상구를 안내하고 있는가? 여러 부처가 모여서 중요한 회의를 할 때에도,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도 비상구가 안내되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28년 차 소방관인 나는 아직도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고집을 부리고 있는 셈이고 여러분이 직접 비상구를 확보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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