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뉴얼 속에 사람이 없다

[2023 안전 책임사회]

by 이건

주한 미 공군 오산기지소방서에 근무하고 있다 보니 종종 미국 자료를 요청받는 일이 있다. 특히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았던 사고나 이슈가 있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그동안 감사원, 해경, 서울시, 소방청, 화재보험협회, 영화사, 방송국, 신문사 등에서 걸려 온 전화들은 하나같이 미국은 우리와 다른 무언가 특별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었지만 사실 대한민국에는 없는 매뉴얼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형식면에서는 완벽한 서류들이 존재한다.


문제는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 심지어는 이런 자료들이 존재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양이 많아 오히려 활용도가 저조하고 일부 정부기관의 연구용역 보고서는 미공개로 설정되어 있어 그 내용을 확인하기 조차 어려운 경우도 있다.


한편 기관별로 경쟁하듯 만들어 내는 백서에는 자신들의 일방적인 입장만이 담겨 있어 피해자 또는 다른 소수의 의견이 반영되기도 어려운 구조다.


보통 매뉴얼은 담당 공무원들이 초안을 만든 후 자문위원회의 검토 과정을 통해 최종 완성되지만 자문에 참여하는 사람 상당수가 논리적 완성도를 고려해 대학교수들로 채워지는 경우가 많고 자료를 검토하는 시간이나 자문료 역시 제한적이다 보니 대개는 형식적인 절차로 전락되기 십상이다.


매뉴얼에는 예방, 대비, 대응, 복구 등 재난관리의 네 가지 요소가 잘 담겨 있어야 하고 한번 만들면 끝이 아니라 재난의 트렌드를 반영해 지속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자료가 될 수 있도록 관리해야 한다.


지난해 1월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기 전 많은 기관과 회사들이 기존의 보건.안전 경영방침을 보다 강화해서 내놓았지만 여전히 산업현장에서는 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지난해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통계자료를 봐도 2022년 한 해 동안 실시한 재해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 숫자가 무려 644명에 이른다는 것이 하나의 방증이다.


매뉴얼이 완벽하다고 해서 현장의 안전 또한 완전하다고 볼 수 없다. 이미 퇴사한 사람들의 이름이 아직도 남아 있는 소방계획서, 다른 회사의 안전 매뉴얼을 그대로 가져다가 복사해서 사용하는 형식적인 매뉴얼만으로는 사고를 미연에 예방하기 어렵다.


사고를 예방하는 데에는 매뉴얼은 기본이고 회사 전반의 안전문화, 안전 전문인력의 숫자와 관련 예산, 안전시설 인프라 구축, 교육과 훈련 시스템, 위험요인 관리 등 다양한 요소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야 비로소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법에서 정했으니 할 수 없이 의무감에 만든 형식적인 매뉴얼 속에는 결코 사람의 안전이 담길 수가 없다. 매뉴얼 속에 사람이 없으니 그 매뉴얼은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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