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안전 책임사회]
지난 25일 아침 미국초등학교 관계자와 통화를 했다. 예정된 화재 대피훈련을 그대로 진행할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마침 그날은 기온이 영하 15도를 넘나드는 매우 추운 날씨였다.
훈련은 매달 시간을 다르게 해서 하고 있는데 교장선생님을 비롯하여 학교 안전담당자 등 일부 인원을 제외하고는 훈련 일정을 선생님과 학생들이 알지 못하도록 지도하고 있다. 왜냐하면 불시에 훈련을 진행해서 화재나 다른 재난상황이 발생했을 때 몸이 먼저 반응할 수 있도록 연습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기 때문이다.
간혹 아무도 모르게 하는 것이 진짜 훈련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학교시험이나 VIP 방문, 그리고 악천후 등 훈련 못지않게 고려되어야 하는 현실적인 사안들이 있으므로 적절하게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이 소방검열관의 노하우 중 하나다.
한 번은 이런 상황도 있었다.
부대 내 호텔에서 예고 없이 화재 대피훈련을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그 호텔에는 비행을 앞둔 조종사들이 투숙하고 있었고 훈련 때문에 잠이 깬 조종사들의 충분한 수면시간을 보장하기 위해 비행 스케줄을 조정하기도 했었다.
소방관에게는 소방규정이 헌법만큼이나 중요한 것이기를 바라겠지만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법과 규정이 존재한다. 그 과정 속에서 충분한 협의와 조정을 통해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겠다는 소방의 임무가 구현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초등학교 관계자와의 통화 이야기로 돌아가서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답변은 예정대로 훈련을 진행하자는 것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한국의
초등학교였다면 어땠을까?
가장 추웠던 아침 9시. 벨이 울리고 화재 대피훈련이 시작됐다. 교사들의 차분한 인솔로 학생들의 대피가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런데 한 가지 상황이 발생했다. 학교 2층에서 근무하고 있는 휠체어를 탄 한 장애인 교사의 대피가 문제가 되었다.
실제상황이 아닌 훈련상항에서 무리하게 대피를 하다 사고가 발생한다면 법적 책임을 묻기 위한 소송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 보다 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했다.
우선 학교에서는 전담요원을 배치해 실제상황에서 장애인 교사의 대피를 돕도록 방안을 제시했고, 훈련 상황인 경우에만 사전 조율해서 예외적으로 엘리베이터의 이용을 승인해 주는 방향으로 임시 조치를 내렸다. 물론 이 결정은 주한 미 공군 오산기지 내부에서만 적용되는 사안으로 지역마다, 또 학교 상황마다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주한 미 공군 오산기지에서는 매월 화재 대피훈련을 한다. 화재 대피훈련 평가 보고서는 향후 학교가 재인증을 받을 때 제시해야 하는 중요한 서류 중 하나다.
방학을 마치고 새 학기가 시작되면 한 달 동안은 주 1회씩 소방훈련을 실시해 희미해진 감각을 되찾으려고 한다. 훈련을 지원해 주는 일들이 소방서 입장에서는 다소 성가실 수도 있겠지만 학교 스스로가 엄격한 안전 기준을 정해놓고 실행하는 것에는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
아직도 많은 훈련들이 틀에 박힌 시나리오에 의해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회사 대표나 기관장이 참관석에 앉으면 모든 훈련은 사전에 정해진 순서에 따라 진행되고 훈련이 마무리될 즈음에는 소방차들이 나란히 서서 힘차게 하늘로 물을 뿌리는 장면을 연출한다.
왜 매번 물을 하늘로 뿌리면서 마무리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쇼가 아닌 실질적인 훈련이다. 이를 통해서 보다 더 효과적인 계획수립과 대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