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안전 책임사회]
간혹 소방검사를 하다 보면 이런저런 고민에 빠질 때가 있다. 특히 현장 상황과 규정이 충돌하는 지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한 번은 한 외부업체가 부대 안에 소화전을 설치한 적이 있었는데 도면에서 지정한 지점과는 다른 곳에 설치하게 되었다. 기존 콘크리트 구조물이 가로막고 있어서 규정보다 조금 짧은 거리에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관계자의 말이다.
그런데 미 육군 소속의 공사 감독관이 재시공을 지시한 것이다. 도로를 다시 파더라도 10센티미터 더 안쪽으로 넣으라고 지시를 했다는 것이다.
규정에 충실하려고 하는 그 사람의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 하더라도 큰 차이가 없는 미세한 간격 때문에 도로 연석을 모두 부수고 기존 도로를 파는 행위는 소방서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출동을 지연시키는 과도한 조치로 판단되었다.
그래서 관할권자(Authority Having Jurisdiction)인 소방서 직권으로 문제없다고 판단하고 서명을 해 준 일이 있다. 물론 이 사안에 대해서는 충분히 더 나은 의견이 존재할 수 있다.
법에서 개괄적으로 정한 내용들이 시행령과 시행규칙으로 구체화되면 그 법은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엄격한 기준이 된다. 하지만 법이 다양한 현장 상황을 모두 만족시킬 수는 없다.
오래전에 만들어진 법이 지금의 국민감정과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법을 집행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규정이라는 틀 안에서 무리하지 않고 업무를 수행하길 원한다.
괜히 자의적으로 규정을 해석해서 업무를 진행했다가 향후 문제가 생기면 민원인으로부터 대가를 받지는 않았는지 불필요한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업무 미숙이나 직무 태만으로 곤욕을 치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안전과 관련된 법률들을 '피로 쓰인 법'이라고 부른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법이기 때문에 매우 엄격하다.
여기에 시대적 흐름을 반영해서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되는 다양한 상업적 기준들도 존재한다. 이 기준들은 시대의 흐름을 충실하게 반영해서 일정 부분 법의 경직성을 보완해 주는 역할을 한다.
기준을 만들거나 업데이트할 때에도 제조사, 연구원, 소방대원, 보험회사, 대학교수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도록 소통의 장치를 마련해 두었으며 관할권자가 가지고 있는 재량의 범위를 폭넓게 만들어 주는 유연성도 내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안전과 관련된 법률들을 '누더기 법'이라고 한다.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하나둘씩 기존 법률을 고쳐서 보완하다 보니 생긴 별명일 것이다.
분명 법이 만들어진 취지가 있을 것인데 문자적으로 적힌 내용만 가지고 마치 앵무새처럼 규정이 그러하다고 반복하는 것이 과연 법의 취지와 부합한 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국가 간의 조약이나 협정에서도 완전한 공평이나 정의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그것보다 훨씬 작은 사이즈의 법과 규정이 과연 완벽할 수 있을 것인지 말이다.
규정을 집행하는 사람 입장에서 봐도 고민스러운데 하물며 규정을 따라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부분은 얼마나 많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