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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 Jan 21. 2020

주한미군 영어 이야기 (1)

미국 동생이 생겼다. 

학창 시절 영어를 좋아하긴 했지만 평생을 영어로 먹고살게 될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2001년 주한미군 소방서로 직장을 옮기면서 내 모든 움직임과 생각을 영어로 표현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과제였다.


미국 소방대원들과 함께 근무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소통과 상호 이해의 노력이 필요하다.


미국 아이들을 미소 짓게 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고민이 담겨 있는지 아마도 모를 것이다.  


지금에서야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지만 나의 20대는 그렇게 썩 아름답지 못했다. TV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레퍼토리처럼 나 역시 집안에 큰일이 생겨 대학을 중퇴해야만 했고 돈을 벌기 위해 공무원이 되었다. 그렇게 24살 어린이는 안정적인 직업을 구했다는 안도감에 빠져 꿈이라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대학 중퇴에 변변한 자격증 하나 없던 내가 주한미군으로 이직을 한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는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운 좋게 직장을 옮기긴 했지만 업무를 위한 기본적인 의사소통 능력조차 갖추진 못한 총체적 난국인 상황에서 난생처음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것에 대해 후회하며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만 했다.    


미국 동생이 생겼다.

고민이 깊어지던 어느 날, 소방서로 한 건의 화재경보가 접수되었다. 출동해서 보니 오작동이다. 상황을 설명해 주기 위해 건물 관계자를 만났는데 그가 바로 내 동생이 되어준 Jason Wiegand다. Jason은 헌병대에서 무전기를 정비하는 친구로 그는 늘 혼자였다. 


한 번의 만남에 용기를 얻어 다음 날 Jason을 또 찾아갔다. 혹시 나에게 영어를 가르쳐 줄 수 있는지 조심스레 말을 건네며 필요하다면 수강료도 주겠다고 했다.  


"Um..." 잠시 코를 찡긋하며 고민하던 그가 "I don't care about money. If you teach me Korean, surely I can teach you how to speak English. What do you say?"라며 매우 세련된 제안을 해 온 것이다.


그렇게 만남이 이어지고 어느 정도 친해지게 되면서 그는 나를 한국말로 형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나에겐 팔자에도 없던 미국 동생이 생겼다. 이런 게 바로 "Brothers from another mother"가 아닐까?


얼마 전 Jason이 보내온 Jason Junior 사진. 평생 결혼 못할 줄 알았는데... 기특하다.


그때부터 쉬는 날이면 거의 그와 어울려 지냈다. 함께 도서관도 가고, 노래방에서 어설프게 팝송도 따라 부르고, 때로는 그의 기숙사 (Barracks)에서 밥도 같이 먹었다.  


Jason은 부드러우면서도 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친구다. 그래서 처음 그와 만났을 때는 영어보다는 오히려 그의 목소리에 익숙해지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그와 대화하다 보니 내가 문법책에서 배운 것과는 상당 부분 차이가 있었다. 보통 일상적인 대화에서는 주어를 생략하고 말하는 것이라든지, 조심스러운 성격의 그가 자주 사용하는 부가의문문도 적응하기 꽤나 어려웠다. 


다행스럽게도 Jason은 그렇게 많은 슬랭 (Slang, 속어)을 사용하지 않아서 그나마 괜찮았지만... 그래도 혹시 못 알아들을까 봐 몇 시간 정신을 바짝 집중하다 보면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영어가 아니다. 인격이다. 

그렇게 Jason을 통해서 자연스러운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 1년이라는 한국에서의 복무기간이 만료가 될 즈음 Jason은 나를 위해 기꺼이 1년을 더 한국에서 근무하기로 결정했고 그때 상으로 받은 메달도 자기는 필요 없다며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내 컬렉션에 소중히 보관되어 있는 Jason이 선물해준 메달.


그와 2년이란 시간을 함께 보내며 깨닫게 된 것은 영어는 단지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굳이 영어가 유창하지 않아도 우정이나 신뢰, 사랑이나 존중과 같은 소중한 가치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실천이 우선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말이라고 다 말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말만 번지르르 한 사람들도 제법 많다. 결국 영어도 우리말도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책임지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주한미군에서 배웠다.


아직도 중요한 이메일을 보내기 전에는 동료 미군들에게 내용을 검토해 달라고 부탁한다. 왜냐하면 오늘 내가 사용하는 영어로 인해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수도, 혹은 사려 깊지 않은 표현때문에 누군가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굳이 세련된 영어를 구사하지 않아도, 또 지나치게 혀를 굴리지 않아도 배려와 실천이 담긴 영어라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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