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에 저장된 오래된 글
-prologue-
최근 2000년대 초 한국 영화에 흠뻑 빠져있었다. 진하지 않은 향기를 머금은 그 필름 영화가 좋았다.
나는 최신의 카메라로 영상을 찍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 옛날 필름 영화를 찾게 되는 건
‘시나브로’
그 은근한 멋을 맛보고 싶은 까닭이다.
결국, 기술의 발전은 마음의 노선과 길이 달랐다.
영화 ‘꽃 피는 봄이 오면’의 촬영지. 서울살이에 지친 현우가 강원도 ‘도계중학교’ 관악부 선생님을 하면서 그려지는 탄광촌 마을의 드라마. 영화 제목처럼 꽃 피는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었을까? 출발 전, 세 번째 ‘꽃 피는 봄이 오면’을 보고 기차에 올라탔다.
도계는 서울에서 버스와 기차로 가는 방법이 있다. 버스는 삼척에 들렀다가 다른 버스로 돌아가는 노선이고, 기차는 도계역에 바로 정차한다. 비록 1시간 가까이 더 걸리지만, 갈아타지 않는 무궁화호 기차에 올라탔다.
내 좌석의 번호를 확인하고 자리에 앉았다. 뒤에 온 할머니가 자신의 자리에 다른 이가 앉아있어 표를 비교해 보다가 본인의 표가 내일 기차임을 알았다.
“야야! 이거 표가 내일 표다”
놀란 할머니는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다시 물어보고는 기차에서 내리려고 하셨다. 그때 오늘 그 자리의 주인이 내리지 말고 우선 타라고 했다. 주변에 다른 아저씨도 내리지 말고 있으면 승무원이 올 거고 그때 이야기해 보라고 할머니를 부추겼다. 그렇게 내일의 할머니와 오늘의 아저씨, 장난치는 꼬마들, 혼내는 엄마, 그리고 이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나까지, 기차문이 닫히고 오늘의 무궁화가 출발했다.
기차와 삶을 비교해 본 적이 있었다. 한 번 달리면 되돌릴 수 없는 열차와 한 번 태어나면 되돌릴 수 없는 우리 삶의 비가역적인 부분이 닮았다고 생각하면서부터였다. 기차를 타기 위해 달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난자를 향해 달려가는 정자의 움직임으로 보였다. 기차에 올라타자마자 문이 닫히고 하나의 정자가 난자에 수정되는 순간 문이 닫혔다. 기차는 출발했고 생명이 탄생했다. 나에게 기차표와 출생신고서는 이렇게 닮아 보였다.
내 나이 서른둘. 지금 나는 32번 좌석에 앉아 되돌릴 수 없는 기찻길 위에 있다. 당신은 지금 몇 번 좌석에서 어떤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까? 같은 칸에 탄 사람들은 또 어떤 모습일까? 기차가 인생이라면 기왕이면 고속 열차보다는 천천히 달리는 이 무궁화호에 올라타고 싶다.
해 질 녘에야 도계역에 도착했다.
(다음 에피소드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