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ARILOG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바리 Aug 28. 2023

비행운이 지나간 자리

[책] 비행운 (김애란, 2012)

시작할 땐 야심찼던 방학이 끝나간다. 세 번째 수강신청을 하고, 방학 끝으로 몰아둔 조교 근무를 나가고, 학교에서 오는 카톡과 메일이 늘어가는 것을 느끼며 방학이 끝나기 전에 뭐라도 미뤄뒀던 것을 해야지 하면서 책장에 오랫동안 묵혀둔 김애란 작가의 <비행운>을 꺼내 들었다.



언젠가부터 문학을 거의 읽지 않게 된 터라 이 책을 언제 왜 샀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예전에 동생이 한번 읽어보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은 내내 습했다. 오래된 집의 꿉꿉함, 허둥거리며 땀 흘린 사람의 축축함, 비 내리는 날씨 혹은 기분의 눅눅함이 느껴졌다. 아니면 그냥 이 책을 읽은 우리 집이 습해서 그렇게 느낀 것 같기도 하다. 입추도 처서도 지나 여름도 거의 끝나가는가 싶더니 날씨는 무슨 장마처럼 흐리고 습했다.


소설은 오랜만이고, 김애란 작가의 소설은 처음이었다. 단편집에 가장 먼저 수록된 "너의 이름은 어떠니"를 읽고서 벌써 가슴이 쾅했다. <비행운>에는 비극이 펼쳐진다. 사람으로부터, 더 나은 상황으로부터 고립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래서 이 냉정하고 비인간적인 세상에 대해 이야기할 법도 하지만, 이야기는 언제나 사람으로 가득 채워진다. 한때 잘 지냈던 누군가, 그래도 나를 만나주는 누군가, 심지어는 세상을 떠난 나의 누군가가 그들의 세상을 채운다. 소설 속 사람처럼, 고립된다고 느낄 때, 외롭다고 느낄 때만큼 사람이 크게 느껴질 수가 없는 것 같다. 막막한 상황에선 과거 누군가와의 기억이, 혹은 오늘 만난 누군가와의 대화가 온 세상이다. '그때 왜 그랬을까', '그 사람은 왜 그렇게 말했을까', '그땐 좋았는데', '아, 그 말은 하지 말 걸'


대부분 나와 머지않은 시기와 장소를 살아온 것 같은 소설 속 사람들의 이야기는 가끔은 내 삶과 겹쳐 보였고, 가끔은 한때 알았지만 이젠 더 이상 알지 못하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고, 더 자주는 '지는 편'에 서겠다며 이런 말 저런 말 늘어놓지만 침대에 누워선 한 번의 미끄러짐으로 계속 추락하는 삶을 불안해할 때 떠올린 일상과 장소를 떠올리게 했다.


책 표지에도 외줄 같은 것이 보이는데, 나는 모두가 외줄 타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 누구도 외줄의 끝엔 뭐가 있는지 모르지만, 외줄에서 떨어지면 안 된다고 굳게 믿고선 외줄을 타고 그 줄에서 떨어지는 순간 '보통 이상의 삶'은 끝일 거라고 생각한다. 공항, 대형 쇼핑몰, 신도시처럼 '보통 이상의 삶'이 오가는 장소에선 삶의 냄새를 갖가지 화학제품과 청소 인력으로 덮는다. 마치 그런 냄새는 '보통 이상의 삶'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살아가는 모든 것은 냄새가 난다. 때때로 마주하는 패배의 냄새가 나고, 지질한 냄새가 나고, 외설적인 욕망의 냄새가 나고, 버둥거리는 땀 냄새가 난다. <비행운>에는 그런 냄새가 농축되어 있다. 이 책을 읽다 잠시 밖을 나갔을 땐 골목에서 부패한 냄새가 더 선명하게 나는 것만 같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Nope. 그렇게는 안되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