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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과 진부함의 자장 - 김려령의 <트렁크>

by 박둥둥

넷플릭스 드라마 <트렁크>를 계기로 책을 펼쳤다. 아직 드라마를 끝까지 보진 않았지만, 첫인상은 의외였다. 소설에서 가져온 것은 기본 설정과 몇몇 인물의 이름 정도에 불과했고,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결을 따라가고 있었다. 드라마와 소설은 같은 제목을 달고 있지만, 서로 다른 세계를 품고 있는 듯했다.


계약결혼물은 언제나 흥미로운 질문에서 출발한다. 결혼은 제도인가, 아니면 순리인가. 사회적으로 잘 어울려 보이는 두 남녀가 사실은 계약으로 묶인 가짜 부부라는 설정,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진짜 사랑이 싹트고, 결국 ‘가장 진실한 결혼’에 이르는 결말. 이 익숙한 플롯은 언뜻 결혼 제도의 허구성을 비판하는 듯 보이지만, 종국에는 ‘진실한 사랑이야말로 결혼의 본질’이라는 가장 보수적인 결론으로 돌아온다. 그래서인지 비평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경우는 드물다. 대다수의 작품이 사랑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섹스를 배제하고, 마지막 순간 ‘사랑’이라는 깨끗한 결실로 결혼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김려령의 『트렁크』는 이 공식을 일부러 뒤틀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여기서 계약결혼은 ‘상품’이며, 이를 관리하는 것은 막대한 자본을 가진 회사다. 섹스 역시 포함된다. 결혼을 ‘구매’한 쪽이 전권을 쥐고, 계약 아내나 남편은 사실상 그 어떤 요구도 거절할 수 없다. 서비스업의 모토 “We never say No”가, 이 결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하지만 이 비틀기가 주는 감각은 참신함보다는 오히려 씁쓸한 의문이다. 멀쩡한 대졸 여성이 왜 이런 위험하고 불안정한 계약에 몸을 담가야 하는가. 회사가 중개자로 끼어드는 순간 계약 조건은 복잡해지고, 사랑은 한층 더 불가능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 논리로 따져보면 더 안전하고 수익성 높은 선택지가 얼마든지 있을 텐데. 소설 속에서조차 “차라리 화류계로 가는 게 낫다”는 말이 나오는 장면이 있을 정도로, 설정의 설득력에는 빈틈이 보인다.


물론 주인공 노인지의 과거 트라우마나 ‘이상적인 결혼을 파는 직업’이라는 설명은 존재한다. 하지만 정작 이야기 속 그녀는 고객의 불만 한마디에 인사고과가 떨어지고, 하루아침에 잘릴 수도 있는 비정규직 신세다. 이렇게 불안정한 구조 속에서 ‘사랑’이든 ‘계약’이든 무게를 가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트렁크』는 현재의 결혼 제도에 대해 신선한 문제의식을 던지고 있는가. 아쉽게도 그렇다고 하긴 어렵다. 이상적인 결혼이란 무엇인지, 혹은 결혼이라는 것 자체가 허상인지에 대한 질문은 끝내 구체적인 답을 얻지 못한다. 남는 건 그저 ‘결혼은 해도 괴롭고, 안 해도 괴롭다. 그렇다면 한 번쯤 내 입맛에 맞는 결혼을 해보자’는 정도의 애매한 설명뿐이다.


결혼, 매춘, 시장 논리, 그리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에 대해 더 깊은 사유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소설을 덮고 난 뒤, 지금의 나는 이 한마디만 하고 싶다.

“노인지 씨, 제발 그딴 회사 때려치우고 다른 일 찾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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