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도 박둥둥의 월급루팡 도서리뷰
일본에서 종종 쓰는 말로 번롱(翻弄)이라는 말이 있다.
고양이가 먹잇감을 가지고 놀다가 죽이듯이 멋대로 희롱한다는 의미이다.
근대 이전의 고전 작품, 특히 비극이나 괴담들에는 운명에 번롱당하는 인간들의 괴로움이 그려진 경우들이 많은데, 한 번 운명의 수레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하면 그 어떤 굳은 의지와 재능으로도 인간은 결코 그 안에서 탈출할 수가 없다. 그저 인간보다 훨씬 큰 신의 양손 안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헤멜뿐. 그래서 옛 작품들을 읽을 땐 일종의 체념과 동정, 애수가 느껴진다.
미야베 미유키의 <흑백> 혹은 에도 시리즈는 일견 이런 옛 고전작품의 분위기를 풍긴다. 어쩌다 뜨거운 프라이팬에 올라간 작은 개미들처럼 번롱당하는 인간들이 흑백의 방을 찾아와 털어놓는 이야기들을 읽으며 독자가 즐거움을 느끼는 이유는, 그들과 내가 상관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나 역시 우연히 저런 운명에 말려들지 모른다는 공감 때문이다. 물론 이 작품은 옛날을 표방한 요즘물건이기에 결말은 다르게 흘러간다.
모두가 힘을 모아 이야기의 힘으로 상처를 극복한다는 내용은 뻔하다면 뻔하다.
하지만 뻔한 내용일수록 누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울림은 달라지는 법.
번롱하는 운명이 맞서는 기억과 이야기들의 합심을 기록한 이 이야기는 그래서 현대적이고 그래서 모던하며 그래서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