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 선생의 세렌디피티

10월 2일 인도의 국부 간디 선생의 생일날입니다.

by kaychang 강연아

남편이 쓴 글 가져왔어요.

****


델리에 살면서 생긴 습관이 있다면, 답답하거나 머리가 아프다거나 시간이 빌 때 간디 선생(1869 - 1948)의 기념관을 찾아가는 것이다.

간디선생의 기념관(Gandhi Smriti)은 녹지로 덮힌 시내 중심지에 있는데 잠시 들러서 한 바퀴 돌면 마음이 가라앉고 편안해 진다. 30분 정도 머물면 충분하다. 찾아 갈 적마다 시골에서 올라온 단체 관광객들로 복잡한 편이지만, 입장료가 없으니 출입은 언제든 간편하다.

아마도 지구상에서 간디 선생을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세상에 남긴 그의 흔적이 그만큼 강렬하다.

인도에서 단 하루를 살더라도 그와 마주치게 되는데, 10루피/ 20루피/ 50루피/ 100루피 /200 루피/ 500루피 그리고 2,000루피 짜리 화폐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간디 선생이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야말로 모든 인도인의 진정한 國父이다.


<세상을 떴을때 지녔던 간디 선생의 유일한 재산>

관공서 뒷 벽에는 현재의 수상이 아니라 간디 선생의 흑백 사진이 어김없이 걸려있다. 어느 도시이든 대표적인 중심지 도로 이름은 공히 M.G. Road (MG, "마하트마 간디"의 줄임)이다. 그의 생일인 10월 2일은 국가 공휴일이다. 이날은 음식점에서 술을 팔지 않는 날이기도 하다.

정치적인 영향력을 보면, 초대 수상인 네루 집안이 그의딸 (인디라 간디), 손자 (라지브 간디) 그리고 라지브 간디의 아내인 소니아 간디에 이르기까지 대를 이어서 계속 정권을 잡으며 - 현재는 아들 라울 간디로 넘어가는 과도기이고 야당이다 - 정치권의 핵심에 자리잡았지만, 인도인들이 마음으로 진정 존경하는 이는 간디 선생이 아닐까싶다.


2007년, 유엔 총회에서는 그의 생일인 10월 2일을 기념하여 "국제 비폭력의 날"International Day of Non-Violence 로 지정했다. 2015년, 영국 런던의 의회 광장에 간디 동상이 세워졌다.


1) 그는 어려서 백인들에 대한 열등감이 무척 심했다고 한다.

위대한 영국인을 보라! 그는 덩치 작은 인도인을 지배하네

왜냐하면, 고기를 먹기 때문에 영국인은 덩치가 5 큐빅이나 되지... (영국 식민지 시절, 유행했던 노랫말 가사라고 한다)

그는 8 살적에 영국인처럼 큰 덩치가 되고 싶어서, 양고기를 먹고서는 토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2) 간디는 13세에 조혼을 했다. 어느 날 간디가 아내와 사랑을 나누고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문을 두드린 것은 하인이었다. 그가 전하길, 부친이 운명하셨다는 것이었다.

간디는 질겁했다. 그의 아버지가 죽어가던 침대 방 가까이에서 그가 바로 조금 전 순간까지 아내와 사랑을 나누다니... 섹스 욕망이 분출하자, 그는 임신한 부인을 깨우기 위하여 병실의 아버지 방에서 살금살금 걸어 나갔었다. 간디는 섹스의 즐거움이 점차 시들해졌다. 지울 수 없는 낙인이 그의 영혼에 남겨진 것이다.

3) 영국으로 법학 공부하러 유학을 갔지만, 영국에서의 간디는 무척 불행했다. 몹시도 부끄러움을 탔기에, 낯선 사람에게 단 한 개의 단어를 말하는 것도 고통스러운 시련이었다. 전체 문장으로 말하는 것은 엄청난 괴로움이었다. 19세의 그는 최신식 법학당inns of court에서는 애처로운 조그만 존재였다. 싸구려 조잡한 봄베이제 옷은 마치 정박중인 배의 돛이 축 쳐져 있는 것 처럼, 그의 자그만 몸 위에 무겁게 걸쳐져 있었다. 참으로 그는 너무나 조그만하고 눈에 띄지도 않아서, 그의 동료들조차 가끔 심부름하는 아이로 착각할 정도였다.

외롭고 참담한 간디는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진정한 영국 신사가 되는 길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봄베이 옷을 벗어 던지고 새로이 양복을 샀다. 실크 모자, 야회용 정장, 명품 가죽 부츠, 흰색 장갑과 은색으로 도금된 보행용 지팡이였다. 그는 곱슬 검은색 머리칼이 머리에 착 달라 붙도록 머리 기름도 샀다. 그는 하루에도 몇 시간씩, 넥타이 매는 법과 외모를 챙기려고 거울 앞에서 생각에 잠겼다. 그가 갈구했던 사회적 인정을 얻기 위해서, 바이올린을 구입했으며 사교춤 클럽에도 가입하고, 불어 개인강사와 웅변 강사도 고용했다. 이 통렬한 몸부림의 결과는 그러나 그가 어렸을 적에 경험했던 양고기 사건과 같이 비참했다.

그는 최종적으로 변호사 자격을 받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인도로 서둘러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고국 행은 개선장군 행차가 아니었다. 몇 달 동안, 소송 건을 찾고자 봄베이 법원근처를 배회하였다. 훗날 3억 인도인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준 목소리의 주인공인 이 젊은이는 단 한 명의 판사를 감동시키는데 필요한 진술서 조차 정확히 읽지도 못했다.

4) 이 실패는 간디의 일생에서 최초의 전환점을 이끌어 준다. 이에 실망한 간디의 가족들은 먼 친척의 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를 남아프리카로 보냈다. 그것은 몇 개월 정도로만 생각되었던 여행 길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20년 넘게 살았다.

남아프리카에서의 간디의 실제적인 신고식은 그가 도착한 일 주일 후, 더반에서 프레토리아로 가는 야간기차에서 였다. 40년이 지난 후에도, 간디는 그 여행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틀을 만들어 준 경험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프레토리아로 가는 중간 쯤에서, 백인 역무원이 그가 앉아있는 1등 칸으로 들어 와서는 그에게 화물칸으로 옮겨가도록 명령했다. 1등 칸 차표를 가지고 있던 간디는 이를 거절했다. 그 다음 정거장에서 백인 역무원은 경찰을 불렀고 간디와 그의 짐은 한 밤중에 기차 바깥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그의 잠겨진 짐에는 오버코트가 있었으나 너무나 부끄러워서 역장에게 물어 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추위에 떨면서 혼자서 불도 꺼진 역 정거장에서 웅크린 채 밤을 새웠다. 간디는 야만적인 인종 차별과 맞선 최초의 사건을 곰곰히 생각하면서 밤을 새웠다. 아침이면 騎士가 될 중세 젊은이처럼, 간디는 기타Geeta 의 신에게 용기와 자신을 인도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조그만 마리쯔버그 역에 아침 해가 떴을 때, 겁많고, 수줍음타던 젊은이는 변해 있었다. 조그만 덩치의 변호사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모한다스 간디는 이제 “아니오”하고 말하려고 했다.

5) 남아프리카에 도착한지 10년 후, 또 다른 긴 기차 여행 길에서 간디의 일생에 제 2의 커다란 전환점을 만났다. 1904년 어느날 저녁, 요아네스버그-더반 기차를 탔을 때, 한 영국 친구가 간디에게 긴 여행 동안 읽을 책을 건네 주었는데, 죤 러스킨John Ruskin 의 “Upto this Last” 이었다. 밤새도록 기차가 남아프리카 초원을 달려 갈 동안, 간디는 이 책을 내내 읽었다. 성경에서 나오는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관한 계시였다. 그 다음날, 더반에 도착했을 때, 간디는 커다란 맹세를 했다: 그가 가진 모든 물질적인 소유물을 포기하고 러스킨의 이상향을 따라서 살겠다는 맹세였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지만 결과론적으로 보면, 간디선생은 20대 말 남아프리카 기차칸에서 잠재해 있던 Serendipity (예상치 않던 것을 뜻밖에 발견하는 능력이나 재능)를 끄집어 내는 극적인 사건을 만났고, 그 사건을 통하여 평생의 삶의 지표를 찾은 셈이다.

언변이 변변치 못했던 소심한 신참 변호사였던 그가 훗날 처칠 수상이 "그 고집 불통 노인네가 단식하는데도 왜 죽지 않냐"고 노심초사할 정도로 눈의 가시같은 인도 독립의 상징으로 떠오를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간디선생의 화장터에서, 지켜보고 있는 인도초대수상 네루>

여전히 간디선생은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평화의 상징이자 용기와 영감을 불어주는 Role Model로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지만, 그의 평범한 인생 여정에서 어떻게 (인도 독립에 관한한) 평생동안 타협 불허의 고집스런 투사로 탈바꿈하게 되었는지 그의 삶 일부를 그의 생일날인 10월 2일에 되돌아 봤다.




#인도에서공부하기 #간디선생.생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