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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할무니 Jul 28. 2019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주사부

탕상수첩, 열네 번째 기록

내리지 못한 서러운 한을 이제야 푸나 보다. 한낱 인간의 마음도 갈대처럼 흔들려 자꾸 흔들려하는 마당에, 대자연의 변덕 앞에 무슨 말을 세울 수 있을까. 서러웠나 보다. 구름은, 그리고 비는, 만들어지고 흩뿌려지는 본연의 역할을 온전히 해내지 못한 게 그랬나 보다. 뭐, 대찬 비는 때론 서러움 외에도 묵은 응어리까지 같이 씻어주곤 하니까. 한풀이와 속풀이가 함께 되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나 다름없네.


창밖을 보면서 시원함과 동시에 걱정이 앞선다. 내게 오지 않을 피해를 걱정하는 건 어쩌면 아무 의미 없을 테지만, 이미 든 걱정은 해소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다면 계속 남을 걱정이 될 테니까. 비록 해결하지는 못할지라도, 해결책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편에 위안이 된달까.

인간은 참 이기적이지. 마음으로 하는 걱정은 정말이지 아무런 의미도 없는데.


그래. 이름을 지어주자. 이 걱정이 뭔지 알게나 하자. 세상에 알리자. 걱정을 하다 보니 걱정을 만들었어요. 내가 이런 걱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주세요. 하지만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건 정말로 내게로 와 하나의 걱정이 되었다.


그때는, 인생의 사부님이 필요한 순간이다.



연근, 당근, 삼겹살 한근, 내 마음은 두근, 탕수육으로 해(우)소하자.


요식업을 관통하는 수많은 키워드 중에서도 최근의 트렌드를 표현하는 말로는 단연 '단짠'이 돋보였으리라. 주사부님은 역시 사부님답게 시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셨고, 사부님의 탕수육 역시 그에 적절히 부합하는 모습을 보이며 내 입맛이 곧 대중의 입맛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역시 복습이 중요하지. 가끔은 이렇게 입맛을 중간 점검하는 시간이 필요할 때도 있다.


공허와 결핍으로 점철된 연근을 보며 마치 내 마음인 것 같아 눈물을 왈칵 쏟을 뻔했지만, 인간은 간사한 동물, 탕수육 한 입을 매개로 쏟을 뻔한 눈물만큼을 내 침과 등가교환했다. 인생이 늘 매몰차지만은 않으니까.

눈에서 멀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맛에 숨었기 때문일까. 확실한 건 어느새 비에 대한 걱정은 사라진 지 오래라는 것. 역시, 맛과 걱정을 한 번에! 일타 강사의 면모를 보여 주는 주사부님이시다.


  

육개장 사발면과 부추덮밥이 함께라면 간짜장 부럽지 않아요.


흡사 육개장 사발면을 보는 것 같은 면발과 무심한 듯 투박하게 담긴 간짜장이다. 자고로 간짜장은 무심해야지, 암. 춘장과 조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을 짐작케 하는 새하얀 양파를 보고 있자니 육개장 사발면이라는 걱정과 무심한 간짜장이라는 해소가 진기명기 공존하는 모양새인 것이, 문제와 정답을 한눈에 보는 해설지가 여기 있구나.



현실판 임전무퇴, 간짜장.


옳다구나. 워낙에 무심하다 보니 방심한 내 마음에도 이렇게 무심한 카운터를 날리는구나. 실뱀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만치 생동감이 철철 넘치는 게, 그래, 생명은 어디에나 있지, 어쩌면 이 면에도, 라는 생각에 빠지려는 찰나 둔탁하고 묵직한 양념 맛이 정신을 바로잡아준다. 듬성듬성 썰어냈지만 촘촘하게 자리한 재료들은 일기당천, 맛에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지 않으니 임전무퇴, 근심, 걱정 파훼하는 바로 이 맛, 역시 주사부님이시다.



주사부님이 만드신 특밥, 주사부특밥이다. 너무 1차원적인 작명이라 당황스럽다면 나도 당황스럽다.


주사부님은 특이하게도 자신의 이름을 내건 특밥을 만드셨는데, 길게 채 썬 돼지고기가 새롭고 깐풍기가 떠오르는 그 맛이 익숙하다. 요리에서 조화로움은 늘 훌륭한 맛을 보장하니까, 주사부특밥이라고 예외일 순 없지. 엎어치고 젖히고 이리저리 뒤섞다 보면 코끝을 찌르는 특급 후추향이 식욕을 돋운다. 짧은 환영 인사를 뒤로하고 한 숟가락 훑다 보면 분명 한 숟가락만 훑었을 뿐인데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릇과 마주하게 된다. 주사부특밥이라 불릴 만한 그것, 역시 주사부님이시다.



저마다의 이름으로 불리어, 다시 누군가의 걱정으로 가라앉겠지만, 세상만사 이름을 가진 걱정들만 있는 건 아니기도 하고, 또 사람들에겐 해(우)소, 또는 도피처 하나씩은 있을 테니까. 그래야만 할 테니까. 그리고 나에겐 그게 탕수육이니까.


끝이 없는 장마에 필요한 그곳, 명경지수의 마음으로 탕수육과의 물아일체 경지를 선보이는 사부님, 바로 '주사부'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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