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시험을 종료합니다
두 번째 실기시험에서도 떨어지고 말았다. 남편에게 떨어졌다고 메세지를 보낸 후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으로 간신히 집에 돌아왔다. 기운이 쏙 빠지고 살 의욕이 사라졌다. 집에 도착해 아이들에게 속상해서 울고 싶다고 말했더니 울어도 된다는 말에 아이를 붙잡고 울었다. 사십 넘은 엄마가 운전면허 실기시험에서 떨어졌다고 아이를 부둥켜 안고 울다니. 다행히 아이들도, 남편도, 두 번이나 떨어졌다고 비난하지 않고 응원해주었다. 그것이 나 자신을 붙잡을 수 있는 마지막 힘이었다.
시험에 떨어지니 운전수업 한 번에 130유로, 운전학원에 지불하는 시험비 200유로, 시험기관에 납부하는 시험비 130유로, 총 460유로를 지출해야했다. 이미 운전수업에 중고차 한 대 값을 썼는데 시험 두 번 보니 그 비용만 1천유로에 육박해 미칠 노릇이었다.
독일 운전 실기시험은 한국과 다른점이 몇 가지 있는데,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시험관이 지시하는대로 도로주행을 해야한다는 점이다. 시험관이 아무 지시를 하지 않으면 직진, 그게 아니라면 지시하는 방향대로 주행을 한다. 어디로 갈지 예측할 수 없다. 시험관에 따라 코스 난이도도 달라지기 때문에 긴장이 될 수 밖에 없다. 운전선생님은 평소 시험관이 가자고 했던 거리들을 기억해두었다가 학생들과 달린다. 예측 가능한 지역을 달려볼 수는 있지만 백 퍼센트 일치하지는 않는다.
달려본 길이라고 부담이 적은 것도 아니다. 도로 상황이라는 것이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무슨 돌발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고, 초보 운전자가 능숙하게 대처하기란 쉽지가 않다. 작은 실수들은 감점 요소가 되고, 위험한 큰 실수를 하면 그 자리에서 시험이 종료된다.
첫 번째 시험은 시작 20분 만에 종료되었다. 떨어진 이유를 수없이 복기해보았다. 큰 실수만 아니라면 나는 충분히 합격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시험 전 마지막 수업에서 평소 가지 않던 길을 갔는데 행운인지 불운인지 시험 때 그곳을 가게 되었다. 행운이라면 아는 곳을 간 것이고, 불운이라면 그때 선생님이 빨리 좌회전 하지 않는다고 다그친 기억이 뇌리에 남았다는 것이다.
좌회전을 해야하는데 나에게 왜 안 가냐고 소리를 쳤고, 그때 당황하며 슝 지났던 기억이 시험 당일에도 떠올라 슝 하고 좌회전을 했다. 시험관과 선생님이 동시에 '어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시험관이 말했다.
"시험은 여기서 종료하도록 하겠습니다."
큰 실수였던 것이다. 침울한 마음에 정신을 가다듬기 어려웠다. 시험관과 운전선생님은 수다를 떨며 이제 내 운전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시험이 종료된다고 내가 운전을 그만해도 되는게 아니라 시험기관까지 운전해서 가야했다. 시험 떨어져서 기분도 우울한데 끝까지 운전을 하자니 짜증이 났다. 확 어디다 박아버릴까??
관대한 시험관이라서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합격할 거라고 했는데 그 '큰 실수'를 하다니. 시험기관에 도착하자 시험관이 이미 시험은 종료되었다며 그 이유를 알겠냐고 물었다. 좌회전할 때 문제가 있었다고 말하니 맞다고 했다. 마주오는 차가 있었는데 그걸 보지 않고 위험하게 좌회전을 했다고 했다. 사실 좌회전을 하려고 기다리는데 정면에 Vorfahrt(우선주행) 표지판이 보였다. 그거 때문에 내가 우선이라고 순간 착각해서 좌회전을 한 것도 있다. 그것에 대해서도 설명하니 시험관은 '이번 시험을 통해서 그걸 하나 배웠으니 나쁘지 않다.'고 했다.
평소 운전을 하면서 비보호 좌회전을 할 때마다 확신이 없었던지라 내 부족한 점이 여실히 드러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관 말대로 이제 제대로 배웠으니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충분하다... 충분하다...아니 진짜.. 충분한거 맞나?? 시험 전 마지막 수업에서 거길 가지 않았더라면, 시험관이 다른 코스로 갔다면, 좌회전할 때 차가 오지 않았더라면, 내가 합격할 이유도 충분한데... 불합격을 납득하는 마음과 그렇지 못한 마음이 수시로 날실과 씨실처럼 가로질렀다. 가족들에게 죄인된 느낌, 지인들에게 무능한자가 된 느낌, 여기 저기 불합격의 소식을 전할 때마다 나 자신이 한없이 작아졌다.
두 번째 시험 전까지 실수를 수없이 복기하고, 실패할 요소들을 확인하고, 코스마다 난해한 점들을 정리해서 공부했다. 이제 더 이상의 실패를 용납할 수 없었다. 어금니 꽉 깨물고 운전해야겠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다가, 스트레스에 미칠 거 같을 때는 '실패할 권리가 있다.'라는 말을 되뇌이며 초라한 변명을 했다. 설마 한 번 떨어졌는데 또 떨어지기야 하겠냐는 생각을 하며 긍정하려고 애썼다. 재수없게 떨어지는 상상은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보기 좋게 두 번째 시험도 불합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