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들어주는 일.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니?!

내가 남의 감정을 왜 들어줘야해? 생각했던 나의 생각 변화

by 토미융합소

어젯밤 갑자기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2년 사귄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술 한 잔 하고 싶다 하더군요 사실 비도 오고 날도 늦어, 귀찮은 마음이 앞섰습니다. 친구를 만나러 가면 분명 막차도 끊길 거고 늦게까지 술을 마시면 다음 날 피곤할 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바쁘다 핑계되고 거절하고 싶었지만 최근 한 mbti 성격유형 검사가 살짝 마음에 걸렸습니다.


최근 mbti 성격유형 검사에서 제 성격은 ENTJ라고 나왔습니다. ENTJ 유형은 상대방을 종종 무시하고 일 중심적인 성향을 띈다고 하더군요. 솔직히 처음에는 ‘무슨 소리야 내가 얼마나 다정다감한데’하며 반발했지만 지금 경우를 보니 제게 확실히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그동안 판단을 내릴 때 그게 나한테 어떤 이득이 되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따져보고 그게 별다른 의미가 없다 싶으면 하지 않으려 했던 거 같습니다. 가령, 친구가 힘들다고 칭얼대거나 심적인 의지를 바랄 때면 ‘왜 이렇게 쓸 대 없는 걸 신경 쓰지? 내가 들어준다고 뭐가 달라져?’ 생각하며 거절했던 것 같았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까지 제가 남의 감정을 무시하는 냉정한 사람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이 제가 의도해서 나온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나온 거기 때문에 '뭐 당연한 거 아냐?' 하며 넘기기 일수였습니다. 하지만 최근 Mbti검사에서 이런 제 심정을 단점이라고 콕 집어주니 , 이 부분에 대해 한 번 고민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나다운(?) 생각으로 이런 나에 대해 시험해보고자 친구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생각보다 친구는 많이 우울해 보이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같이 잔을 부딪혀 얘기를 들어보니 스스로에 대해 많이 자책하고 있더군요. 애초에 남의 연애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성격이 아니라, 그냥 묵묵히 맞장구를 쳐주며 이야기를 들어줬습니다. 쭉 친구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밤이 꽤 깊어졌습니다. 계산을 하고 나와 집으로 가는 길, 친구가 그래도 말을 하고 나니 속이 후련하다고 고맙다 하더군요. 딱히 도움이 될 말도 위로가 될 말도 건네지 않았는데 고맙다는 친구의 말을 들으니 오길 잘했구나 싶었습니다. 집에 도착해 씻고 나니 시간이 벌써 3시가 다 됐습니다. 친구는 힘들었는지 금세 곯아떨어졌고 저는 이불에 누워 오늘 느낀 기분에 대해 곱씹어 봤습니다. '친구의 감정을 들어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감정은 생명력


감정은 '생명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건넬 때 그것에 감정이 묻어나 있다면 저는 그 속에서 그 사람의 생명력이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슬픔이든 행복이든 분노든 희열이든, 모든 감정은 결국 그 사람의 생명력에서부터 나오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감정이 없는 정보전달 글이나 이성적인 말속에는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 글에 있어서 그것을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심정으로 말했는지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국 감정을 이야기하고 들어주는 행위는 서로의 생명력을 주고받는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런 생명력을 주고받는 행동이 문제 해결만큼이나(어쩌면 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충분한 의사결정과 문제 해결을 할 수 있는 기계를 보고 생명체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컴퓨터 속 캐릭터를 보고 생명체라 하지 않습니다. 결국 감정(=생명력)은 생명체가 생명다워 보이게 해주는 힘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힘은 주변 다른 생명체들에게 전달돼 생명체들이 에너지를 내는데 도움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럼 그런 생명력은 어떻게 얻어지느냐 한다면 저는 그것은 오로지 경험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감정 중 자신이 경험한 감정만이 자기의 생명력으로 변환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어쨌든 유한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경험할 수 있는 감정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좀 더 다양하고 많은 생명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감정을 서로서로가 공유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즉 감정을 주고받는 행위를 통해서만이 우리는 유한한 생명력 스펙트럼을 넓혀 나갈 수 있습니다.


만약 어제 제가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저는 평생 '처음 서울로 상경해 힘들게 일하다 만난 여자 친구와 2년 만에 헤어진 직후의 생명력'을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 친구 또한 저의 침착하고 단조로운 생명력을 받지 못하고 자신의 생맹력에 더욱 파묻혔겠죠. 이처럼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는 행동은 한 사람의 벅차오르는 생명력을 안정화시키고 다른 사람의 생명력을 다양하게 만드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행위인 것 같습니다.




저는 그동안 이성적 판단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거나 올바른 방향을 찾기 위해서는 감정을 배제하고 사실과 논리성에 근거한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문제 해결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게임 속에 항상 '버프 캐'가 있습니다. 몬스터를 직접 사냥하기보다는 주변 팀원들이 몬스터를 더 잘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세상에도 직접 문제 해결을 하진 못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에너지를 북돋아줄 수 있는 ‘버프 캐’가 필요합니다. 결국 상대방의 감정을 들어주는 행동은 나의 생명력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주변에 생명 에너지를 불어넣어주는 최상위 ‘버프 기술’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keyword
이전 05화'나'라는 상상 속의 동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