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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이디푸스 Aug 26. 2019

'방과 방 사이' 게임을 보면 커뮤니케이션이 보인다

(feat. 방과 방 사이)

  회사 내에서 직급이 올라갈수록 점점 더 많은 회의에 참석하게 된다. 사원, 대리 때는 각자 담당하고 있는 프로젝트 관련 회의나 팀 전체 회의에 참석하면 되지만 과, 차장이 되거나 팀장, 부서장이 되면 참석해야 할 회의 건수가 늘어난다. 주간회의, 월간회의, 그리고 주요 이슈에 대한 회의, 연말 성과 회의, 경영진 회의 등 많은 회의에 참석한다. 회의에서 많은 정보(회사 경영상황, 경쟁사 동향, 시장 전망, CEO가 중시하는 것들)들이 오고 가고 많은 의사결정이 이루어진다. 직급이 낮을수록 회의 참석 건수는 적고 의사결정 권한도 없으며 맡은 업무수행이 주 업무이고, 직급이  높을수록 회의 참석은 잦아지고 많은 의사결정을 하며 의사결정에 대해서 직원들에게 지시하고 업무 배분하는 것이 주 업무가 된다. 여기에서 정보의 불균형이 일어나게 되고 의사소통에 있어서도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가족오락관에서 진행하던 '방과 방 사이'게임이 있다. 이 게임은 요즘에도 여러 TV프로에서 종종 볼 수 있으며, 레크리에이션 때 자주 등장한다. 어떤 모임에서 게임을 준비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이 게임을 준비하면 거의 성공적이다.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지켜보는 사람들은 즐겁다.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우리가 의사소통하는 모습들을 잘 보여주는 듯하다. 우리들의 '의사소통'도 이처럼 우스꽝스럽고 어렵다는 뜻이다.  


  게임에서 첫 번째 사람만 정답을 알고 있다. 첫 번째 사람이 다음 사람에게 정답을 전달해줘야 한다. 첫 번째 사람은 회사 내에서 CEO가 될 수도 있고 팀장이 될 수도 있으며 업무 담당자가 될 수도 있다. 이 게임에서 모든 과정이 쉽지 않지만 첫 번째 사람에서 두 번째 사람으로 넘어갈 때가 가장 쉽다. 첫 번째 사람은 정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첫 번째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답을 두 번째 사람에게 몸짓으로 잘 설명해주기만 하면 된다. 두 번째 사람부터는 앞사람이 몸짓으로 설명하는 것을 보고 정답을 유추한 다음에 자신이 생각한 정답을 세 번째 사람에게 다시 설명해줘야 한다.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상황이 발생한다. 


1. 첫 번째 사람이 설명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경우

2. 첫 번째 사람이 설명을 잘했으나 두 번째 사람이 엉뚱하게 받아들이는 경우

3. 첫 번째 사람이 제대로 설명하고 두 번째 사람도 제대로 이해했으나 두 번째 사람이 세 번째 사람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경우

4. 두 번째 사람까지 제대로 이해하고 세 번째 사람에게 설명도 제대로 했으나 세 번째 사람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


  위의 네 가지 경우 모두 의사소통 실패다. (설명을 제대로 못했으나 상대방이 원래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제외하였다. 이런 경우가 없진 않지만 극히 드문 경우며 이런 경우를 의사소통이 잘 된 경우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를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방과 방 사이'게임처럼 세 명이 순차적으로 의사소통하는 경우를 나타내었다. 과정마다 한 순간이라도 삐끗하게 되면 의사소통은 실패하고 만다. 모든 순간 전달이 잘 되어야지 의사소통이 성공할 수 있다. 매 과정마다 의사소통이 성공할 확률과 실패할 확률이 동일하다고 가정하면 세 사람이 의사소통에 성공할 확률은 1/16(6.25%)이다. 단계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확률은 줄어든다. 물론 일상생활에서 회사 업무에서 매 단계마다의 의사소통의 성공확률이 50%는 아니다. 그보다 훨씬 높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단계가 늘어날수록 의사소통은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의사소통의 실패는 누구의 잘못인가?

  만약 마지막 사람이 첫 번째 사람의 의도와 전혀 다른 정답을 외친다면 누구의 잘못일까? 아마도 첫 번째 사람은 자신은 잘못 없다고 할지 모른다. (자신이 설명을 잘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 해도) 첫 번째 사람은 정답을 이미 알고 있고 그 정답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반면에 잘못된 정답을 말한 사람은 미안해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지도 모른다. (설령 앞사람이 설명한 대로 답을 말했다고 하더라도) 단계를 여러 번 거쳐야 하는 경우는 매 단계마다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확인하지 않는 이상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기 어렵다. 그리고 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앞, 뒤 사람하고의 상황만 알기 때문에 훨씬 앞이나 훨씬 뒤에서 일어난 상황을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이 답을 말한 뒤에 바로 다음 문제로 넘어가야 하기 때문에 점검할 시간도 없다. 하지만 게임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하면 설명하는 사람이 잘못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에 굉장히 동의하는 편이다. 설명을 하는 사람에게 좀 더 많은 책임을 부여하고 싶다. 왜냐하면 설명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그것을 모르는 사람에게 의미를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상대방에 맞춰서 설명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똑같이 설명해줬는데 쟤는 알아듣는데 왜 너는 못 알아들어?"라고 말한다면 정말 못 알아들은 사람 잘못일까? 설명한 사람은 잘못이 없을까? 설명을 듣는 사람이 바뀌면 설명 방법도 바뀌어야 한다.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배경지식을 좀 더 설명해 줘야 할 필요도 있고, 이해 수준이 낮다면 좀 더 쉽게 설명해줘야 할 필요가 있다. 상대방에서 설명하는 이유가 상대방이 알아듣고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렇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일방적인 설명만 하고 끝내고 상대방이 알아들었는지 확인도 하지 않는다면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설명을 해줬으니 끝이다'라고 하면서 그다음에 일어나는 상황(상대방이 알아듣거나 못 알아듣거나)에 대해서는 상대방에게 모든 책임을 떠맡기는 사람이 많다. 그것은 애초에 상대방을 이해시키기 위한 목적이 빠져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냥 본인의 지식 자랑에 불과하지 않다. 물론 1:1 커뮤니케이션이 아닌 1대 다수의 커뮤니케이션이라면 모든 사람을 이해시키기 어려울 수 있다. 상대 그룹이 다양한 지적 수준, 업무분야, 경험 등을 가지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그럴 땐 주요 타깃을 정하고 거기에 맞춰서 설명을 진행하는 것이 효율적일 수 있으나 그 마저도 실패하는 경우도 많다.

 

  대학 강의 때 이런 것을 많이 느꼈는데 비슷한 수준의 학생들이 모여서 수업을 듣는데도 어떤 수업은 수업이 끝나고 주변에 물어보면 알아들은 친구들이 없다.  학생들 수준은 1~2단계에 있는데 교수님 수업은 5~6단계에서 달려가고 있다. 그렇게 학업을 포기하거나 열심히 공부해서 3~4단계까지 쫓아가거나 5~6단계까지 올라가는 소수의 학생들도 있다. 소수의 5~6단계까지 따라오는 학생을 타깃으로 잡은 것이 아니라면 이 강의는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처음부터 평범한 학생들은 그 교수님의 수업 대상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대학시절 많은 교수님들이 본인들이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얼마나 아는 것이 많은지를 자랑하시는 분이 많았던 것 같다. 나는 그분들이 교수가 된 것에 대해서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지만 그분들은 학생들에게 자꾸만 자신들이 어떻게 교수가 되었는지를 증명한다. 그때 네게 필요한 건 100을 아는 교수님이 아니라 10을 알아도 나에게 1이라도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많이 아는 것과 잘 가르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많이 알아야 더 높은 수준의 지식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맞지만 상대방이 그 수준까지 올라오지 않은 이상 그런 지식까진 필요 없다. 나와 비슷한 수준의 옆의 친구가 나를 가장 잘 가르쳐줄 수 있다. 유능했던 운동선수들이 감독이 돼서 실패하는 사례는 많이 볼 수 있다. 배우는 능력과 가르치는 능력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통 회사생활에서는 상급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해하지 못한 하급자의 잘못이고 하급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 설명을 제대로 하지 못한 하급자의 잘못으로 여긴다. 직급 낮은 게 서럽다. 직급이 높고 볼 일이다.  


의사소통이 실패하는 이유는 많다. 그중에서 몇 가지 이유를 살펴보자.

1. 지식의 저주에 빠져있다.

 지식의 저주(The Curse of Knowledge)는 미국 스탠퍼드 경영전문대학원 교수 칩 히스(Chip Heath)가 의사소통 문제를 설명하며 자주 언급한 개념으로, 본래 의미는 사람이 무엇을 잘 알게 되면 그것을 모르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 상상하기 어렵게 된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전문가들은 자신의 수준에 기대어 일반인들 수준을 예단하게 되고, 그 때문에 전문가들이 나름대로 쉽게 설명한다고 생각하는 내용도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등 의사소통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히스는 정보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의사소통에 실패하는 이유가 지식의 저주에 있다고 봤다.

[네이버 지식백과]지식의 저주 [The Curse of Knowledge] (트렌드 지식사전, 2013. 8. 5., 김환표)


  지식의 저주는 위에서 언급한 교수와 감독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고, 우리는 알게 모르게 생활 곳곳에서 늘 경험하며 지낸다. 지식의 저주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실험이 있다. 한 그룹은 누구나 알만한 노래를 박수로 장단을 맞추고 한 그룹은 그 문제를 맞힌다. 그리고 문제 출제자 그룹에게 상대 그룹이 얼마나 맞출 것 같냐고 물으면 거의 맞출 것 같다고 답한다. 하지만 문제를 맞히는 그룹은 그 문제를 잘 맞히지 못한다. 문제 출제 그룹은 지식에 저주에 빠진 것이다. 강의를 진행하는 교수님들과도 같다. 아래의 관련 영상을 보고 문제를 맞혀보길 바란다. 

EBS 다큐프라임-인간의 두 얼굴 2 중에서

  친구 세명이 같은 차를 타고 이동할 때 차 안에서 라디오가 흘려 나왔다고 하자. 조수석에 앉아있던 친구는 라디오에서  안에서 나온 말이 아주 인상 깊어서 마음에 담아두게 되고 운전을 하던 친구는 초행길에 내비게이션에 집중하느라 라디오를 듣지 못했으며 뒷좌석에 앉은 친구는 라디오 소리가 잘 안 들려서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때 조수석에 앉아 있던 친구가 라디오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 친구 입장에서는 라디오가 흘러나오는 같은 공간에 모두 함께 있었기 때문에 모두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며, 그것을 전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가능성이 크다.  


  회사에서 어떤 직원이 한 가지 문제를 몇 날 며칠을 깊게 고민하다가 옆의 동료와 의견을 교환한다. 그 동료는 다른 일을 하고 있었으며, 그가 고민하던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동료와 의논을 할 때 지식의 저주에 빠져서 배경 설명 없이 앞 뒤 자르고 질문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배경 설명을 한다고 해도 매우 빈약한 설명이 되는 경우가 많다. 


2. 배경 설명을 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나무의자에 못이 빠져 있는 것을 보고 못을 박기 위해서 망치를 찾았는데 망치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망치를 대체할만한 것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돌멩이가 있으면 못을 박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주변의 몇 사람에게 돌멩이가 필요한 이유에 대한 설명 없이 '어디 가서 돌멩이를 구해와'라고만 지시를 한다. 그때 어떤 사람은 돌멩이가 없다고 빈손으로 오고 어떤 사람은 못을 박기에는 힘들어 보이는 조약돌 가져온다. 이때 지시를 한 사람은 이것으로 못을 어떻게 박냐며 불평을 한다. 그때 옆에서 그것을 들은 빈손으로 왔던 사람이 나에게 망치가 있다라며 망치를 건넨다. 처음부터 돌멩이를 가져오라고 지시한 사람이 의자의 못이 빠져 못을 박기 위해서 돌멩이가 필요하다고 했으면 첫 번째 사람은 자신에게 망치가 있다며 망치를 건네었을 것이며, 두 번째 사람은 조약돌을 가져오는 경우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돌멩이를 찾다가 없어서 못을 박을 수 있는 다른 대체할만한 것을 가져왔을 수도 있다. 아니면 새로운 의자를 구해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회사에서도 이런 일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팀장이나 부서장들끼리 회의를 통해서 결론을 내고 직원들에게 그 결과에 대해서만 지시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는 위의 사례처럼 조약돌을 가져온 직원에게 욕을 하고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하고 빈손으로 온 직원에겐 무능력하다고 평가한다. 심지어 그에겐 망치가 있었는대도 말이다. 억울한 일이다. 몰론 업무지시를 받았을 때 배경 설명을 요구할 수 있다. 지시하신 일이 왜 필요한 것인지 물어보면 일을 하기 싫어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하고 시키는 일에 토를 단다고 뭐라 하는 상사들도 있다. 그리고 배경 설명하기를 굉장히 귀찮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3. 자의적 해석이 들어간다. 

  어느 회사나 CEO가 특별히 강조하고 중요시하는 것들이 있다. 이러한 CEO의 의지를 회의 때 계속해서 강조한다. 하지만 CEO의 회의에는 임원이나 팀장들이 참석하며 일반 직원들은 보통 참석하지 못한다. 시무식이나 종무식 때나 CEO의 메시지를 듣는 경우가 많다. 임원이나 팀장들은 그 메시지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잔소리처럼 자주 듣는다. 하지만 그 메시지는 직원들에게 그만큼 전달되지 않는다. 회의를 하고 나온 팀장들이 팀원들에게 메시지 전달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은 회장님이 어떤 말씀을 하시더냐고 물으면 "별거 없었어. 늘 같은 소리야."로 끝난다. 회장님의 메시지가 임원이나 팀장에게 전달되는 것과 그것이 말단 직원에게 전달됐을 때의 느낌은 천지차이다.

 

  '방과 방 사이' 게임에서 첫 번째 사람이 문제를 설명하고 두 번째 사람이 정답을 유추하고 세 번째 사람에게는 그 유추해낸 정답을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두 번째 사람의 자의적 해석이 들어간다. 만약에 첫 번째 사람이 설명한 바를 제대로 이해했고 이를 세 번째 사람에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세 번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으로 설명을 해나간다면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 사람이 잘못 이해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잘못 이해한 바를 토대로 세 번째 사람에게 설명하면 그다음부터는 계속해서 오답이 전달되어 있다. 그리고 그 오답이 또 다른 오답으로 바뀌기도 한다. (게임에서는 오답으로 바뀌었던 문제가 마지막에 가서 다시 정답으로 바뀌어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재미있어하기도 한다) 그래서 군대에서는 복명복창을 한다. 만약 두 번째 사람이 정답을 전혀 유추해내지 못하는 어떤 일이 생길까? 그렇게 되면 첫 번째 사람이 했던 행동을 최대한 비슷하게 다음 사람에게 전달한다. 그러면 그것을 본 다음 사람이 정답을 유추해 내기도 한다. 어쩌면 잘못 이해하고 잘못 전달하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 회사에서도 CEO의 메시지를 임원이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그것을 팀장에게 전달하고 팀장도 임원의 메시지를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팀원에게 전달하고 팀원들 또한 그것을 각자 해석한다. 그렇게 되면 CEO의 메시지가 전혀 다르게 전달되기도 한다. 그래서  전달이 안되거나 잘못 전달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직접 의사소통을 시도하는 CEO들도 많다. 


4. 척하면 척? 우리는 초코파이가 아니다. (말하지 않으면 끝까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척하면 척'하기를 바란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뜻을 알아주길 바란다. 힘들다고 말하지 않아도 힘든 것을 알아주길 바라고, 연봉 올려달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올려주길 바라고, 내가 무엇을 먹고 싶은지 말하지 않아도 내가 무엇을 먹고 싶은지 알아내서 그것을 먹으러 가길 바란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달라고 말하지 않아도 도와주길 바란다. 그런데 만약 상대방이 알아주지 않거나 도와주지 않으면 실망하기도 한다. 예전에 TV를 켜면 초코파이 광고에서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가 자주 흘러나왔다.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의사소통의 시작은 말하는 것부터라고 할 수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길 바라는 것이 의사소통에 있어서 얼마나 큰 문제를 가져오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오래전 인터넷에서 봤던 내용인데 인상 깊어서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어느 노부부가 있는데 사이가 좋지 않아 이혼을 하게 되었다. 법원에서 이혼 판결을 받고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식사를 같이 하기로 하고 치킨을 먹는다. 이때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닭다리를 건네주며 할아버지는 닭날개를 먹는다. 이때 할머니가 화를 내며 " 당신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에게 이러는군요. 내가 좋아하는 날개는 항상 당신이 가져가고 내가 싫어하는 닭다리만 계속 주다니.."라고 말한다. 이때 할아버지가 "나는 닭다리를 좋아하는데 당신도 닭다리를 좋아하는 줄 알고 당신에게 양보해왔던 것이오. 그리고 나는 날개를 좋아하지 않소." 수십 년 동안 서로 좋아하지 않는 부위만 먹어왔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항상 할머니를 위해 양보하고 희생해 왔지만 할머니로부터 어떤 감사함도 받지 못했으며 오히려 증오의 감정만 받아왔다. 할머니 또한 항상 싫어하는 닭다리를 먹어야 했고 닭날개를 먹으면서 자신에게는 닭다리를 주는 할아버지가 얼마나 미웠을까? 정말 끔찍한 상황이다. 1,2년도 아니고 수십 년 동안 말이다. 서로가 좋아하는 부위에 대해서 한 번이라도 이야기를 나눴으면 이런 일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좋아하는 닭다리를 먹고, 할머니도 좋아하는 닭날개를 먹을 수 있었는데 지금까지 서로 좋아하지 않는 부위를 먹어온 것이다. 수십 년을 살아도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그리고 오랜 시간 함께 해야 하는 사이일수록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잠깐 만나고 말 사이라면 닭다리를 먹든 닭날개를 먹는 그 순간만 지나면 끝이지만 계속 만나야 하는 사이라면 말해야 한다. 


  회사에서도 일이 많으면 많다고, 모르면 모른다고, 부당한 것은 부당하다고 항상 말을 해야 한다. 팀장은 내가 일이 많은 것 같지 않아서 일을 주고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일을 시키고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하는 행동들이 많다. 하지만 팀원 입장에서는 팀장이 나를 싫어하고 괴롭히는 것 같다고 느끼며 팀장을 미워하고 멀리하게 된다. 말을 하지 않으면 팀장은 일이 많은지 모르고 오히려 일을 좋아하는 줄 알고, 모른다는 생각은 못하고 일처리가 느리거나 무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팀장하고 이야기를 해보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위의 노부부와 같은 상황은 피해야 한다. 



 참고자료

[네이버 지식백과]지식의 저주 [The Curse of Knowledge] (트렌드 지식사전, 2013. 8. 5., 김환표)
EBS 다큐프라임-인간의 두 얼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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