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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 하루 Mar 12. 2021

겨울 끝에 모순된 마음

겨울 이야기를 좀 더 쓰고 싶었는데 몇 번이나 글을 쓰고 지우고 하는 사이, 어느새 창밖의 눈이 녹기 시작했다.


매번 이 시기가 되면 내 안의 모순과 마주한다. 그렇게 지겹던 눈이 언제 녹나 싶다가도 막상 아스팔트가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괜스레 아쉬운 마음이 든다. 눈에 대한 아쉬움은 아니다. 겨울을 핑계로, 눈을 핑계로 미루고 도망칠 수 있었던 시간이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운전'이다. 내 정신 건강과 지구 평화를 위해서라도 나 하나쯤은 운전을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삿포로는 일본 5대 도시라는 말이 무색하게 차가 없으면 굉장히 불편한 게 사실이다. 지하철 노선도 3개밖에 없어 시내 곳곳을 전부 커버하지 못하고, 버스, 지하철, 전차 간의 환승도 불편하다. 환승 할인율은 또 어찌나 낮은지. 차로 가면 10분 거리인데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40분은 족히 걸리기도 하고, 비싼 교통비는 말해 뭐해. 결국 금 같은 시간과 비싼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운전을 택하게 된다.


그런데 이 운전 압박감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 시기가 바로 겨울이다. 온 세상이 빙판길로 변해버리니 아예 운전을 포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길 운전을 연습해서 아무 불편 없이 도로를 달리지만, 운전 쫄보(=나)는 차선이 전부 눈으로 덮여 하얀 빙판길로 둔갑한 도로를, 게다가 곳곳에 쌓인 눈더미와 시도 때도 없이 휘날리는 눈발로 시야 확보가 어려운 그 눈길을 달릴 만한 배짱이 없다(나도 내가 무서워...) 그렇게 눈을 핑계로 운전 압박에서 도망칠 수 있는 시간도 눈이 녹기 시작하면 무효해진다. 겨울 내내 움츠리고 있던 내 안의 운전 감각을 다시 하나둘 깨워줘야 할 때가 오고 있다.  


어디 운전뿐이랴. 운동도 그렇다. 칼바람+폭설+빙판길을 핑계로 겨울 시즌엔 아침 조깅도 멈춤이다. 바깥 날씨도 춥고 베란다에 눈이 쌓였다는 갖은 핑계를 대며 두 눈 감아온 온갖 이불 빨래들도 여기에 해당한다. 그 외에도 일상에서 방치 혹은 도피해 온 기타 등등과 마주해야 할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나에게 한없이 관대할 수 있었던 마음들이 눈과 함께 녹아 내린다. 이제는 단단히 부여잡을 시간이다. 눈 때문에 이것도 못해, 너무 추워서 저것도 못해, 하며 툴툴댈 수 있을 때가 오히려 맘 편하다는 내 안의 모순들. 그 알량한 마음과 매번 마주하는 겨울의 끝자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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