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으로 산지 이미 오래이지만 내게도 어른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특히 언제 그런가 하면 스스로의 부족함을 자각하거나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일 때 그렇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한계치보다 한 걸음 먼저 멈춰 섰던 것 같다. 열심히 했지만 성실함의 한계를 넘어선 성취는 이루지 못한 것 같은 아쉬움이 나를 생각에 잠기게 만들곤 한다. 어린 시절 곁에서 나를 북돋워줄 존재가 있었다면 조금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었을까? 부질없는 생각이 차오를 때면 한숨을 크게 한 번 내쉬고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돌이킬 수 없는 일, 이젠 내가 그런 어른이 되어버리면 그만이다.
다행히 내겐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있다. 한 톨도 잊지 못한채 마음속에 쌓인 불행의 기록은 이제 아이에게 들려줄 참고서로 쓰인다. 세상에 버릴 불행은 없다는 뜬구름 같은 말이 이해되는 순간이다.
얼마 전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는 태권도장에서 하는 저녁 훈련에 갔다가 길을 잃었다. 도장에서부터 근교 공원까지 왕복하는 코스였는데, 힘에 부쳐 일행으로부터 낙오되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큰일 없이 집에 돌아왔지만 생각보다 멀리에서 오래 헤맸던 것 같다. 혹여 놀란 아이가 그 기억에 매몰될까 짐짓 담담한 척했지만 해도 완전히 저문 깜깜한 저녁 낯선 곳에서 얼마나 두렵고 막막했을지.. 며칠 동안 마음이 아려 괴로웠다.
한편으로는 나보다도 더 침착해 보이는 아이가 기특하기도 했더랬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고 초등학교에서의 첫 봄소풍 날짜가 다가왔다. 내내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아이가 소풍 전날 밤 자러 들어갔다가 안방으로 와선 내 품에 안겨 훌쩍이기 시작했다.
"나 소풍 가기 싫어."
"왜? 그동안 기대했잖아."
"길 잃을까 봐 무서워.. 선생님 잃어버리면 어떡해?"
점점 빨개지는 낯빛, 삐죽 내려가는 입꼬리와 설움에 움츠러드는 미간을 보고 있자니 나도 같이 울고 싶었다. '그날 무척 놀라고 힘들었던 거구나.. 놀란 마음 여태껏 삭이고 있었던 거구나..'
그래도 나쁜 기억에 매몰돼 첫 소풍을 안 갈 수는 없는 노릇. 아이의 불안한 마음에 안심을 심어줘야 했다.
"그날 너무 놀라고 무서웠구나. 그날 어두운 저녁이었는데 혼자 무리에서 떨어진 건 네 잘못이 아니야. 관장님이나 사범님이 제일 꼬맹이인 너를 잘 챙겼어야 했는데 아이들이 많아서 그러지 못하셨던 것 같아. 네가 부족하고 잘못해서 그런 거 아니야 알겠지? 학교 소풍은 낮에 가는 거라 밝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리고 워치로 엄마한테 언제든 전화할 수 있고, 만일 길을 잃더라도 어른들께 도움 요청하면 도와주실 거야. 경찰관님도 마찬가지지. 엄마가 온 세상 CCTV 다 뒤져서 너 있는 곳 찾아갈 거니까. 걱정하덜 덜 마!"
"정말? 미국 CCTV도 뒤질 거야?
"그럼! 우주에 있어도 찾지!"
"엄마~ 내가 한국에 있는데 왜 미국 CCTV를 뒤져~ 우주는 또 어떻게 가~"
시답잖은 농담도 섞어가면서 과장되게 설명해 줬더니 아이는 깔깔 웃으면서 다시 잠을 청했다.
내게도 똑같진 않지만 비슷한 낙오의 경험이 있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체험학습 숙제를 하기 위해 집합장소로 나갔는데 어찌 된 일인지 약속한 곳에서 한 시간 넘게 기다려도 친구들을 만날 수 없었다. 내가 위치를 착각했는지, 친구들이 일부러 다른 장소를 알려줬던 건지 아직도 확실하진 않지만 낙오의 경험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작아지게 만들었다. 아이가 나와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독여주었다.
길을 잃은 것이 너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 네가 어디에 있든 세상의 모든 어른이 너를 도울 거라는 것. 어린 날의 나에게도 그런 확신이 필요했던 것 같다.
부모로서 아이에게 무언가 꼭 가르쳐야 한다면 여러 가지 중 나는 '힘듦을 견딜 줄 아는 힘'을 우선순위에 두고 싶다. 딸은 수영을 배운 지 1년이 됐다. 유치원 때는 놀이수영으로 물놀이하듯 가볍게 다녔지만 이제 나름 경력이 쌓인 만큼 보조기구도 떼고 진자 영법을 배우는 중이다. 딸이 어느 날 물었다.
"나 수영 언제 그만둬? 이제 너무 힘들어. 재미도 없고. 안 하고 싶어."
"원래 모든 배움은 실력이 늘어날 때 가장 힘들어. 늘 재밌는 것만 하고 살 수는 없어. 네가 물에서 자유롭게 수영할 수 있을 때 그만둘 거니까. 그냥 해. 힘들어도 그냥 해야 되는 일도 있어. 세상엔 그런 일 투성이야."
아이는 계속해서 투덜댔지만 알아야 했다. 힘들어도 한번 더 지속하는 힘이 인생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수영 선생님께는 따로 상담을 요청드렸다. 진도를 여쭤보니 아이가 잘 따라오는 편이라 최근에 난이도를 꽤 높였다고 했다. 난 진도를 빨리 떼는 것보다 오래 걸리더라도 아이가 물과 친하게 지내면서 즐겁게 꾸준하게 임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에 난이도를 낮춰달라고 부탁드렸다. 그랬더니 다음 주부터는 아이의 표정도 한결 밝아져 한 시름 덜었다.
힘들 때 당장 그만두기보다 힘들어도 한번 더 나아가는 힘. 아이 인생의 코치로서 그런 지구력을 난 알려주고 싶었다.
나의 어린 시절 엄마는 내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다만 엄마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엄마는 내가 아프지 않기만을 바랐다. 아프면 돌봄이 필요하니까. 공부에 대해 강조하지도 않았다. 모든 것은 네 책임이니까 알아서 하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 말이 얼마나 무책임한 발언이었는지. 이제는 안다. 울타리 없는 자율성은 아이를 더 불안하게 만든다. 어디까지 가야 할지 몰라 더 작은 범위 내에서만 맴돌고 만다.
밥만 잘 먹어도 칭찬해 주고, 예뻐해 주는 시기가 지나간 이때, 어쩌면 진짜 육아는 지금부터 란 생각이 든다.
아이 인생의 선생님이 아닌 코치, 동반자로서 함께할 나의 역할이 기대되는 요즘이다. 확실한 단호함과 따뜻한 격려 이 모든 경계에서 중심을 잡아야 할 것이다.
내가 참 싫었던, 내게 참 필요했던 어른 그 사이를 외줄 타기 하다 보면 그 중간 어딘가에서 아이에게 쓸모 있는 어른으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