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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 아닌, 엄마의 엄마

by 김윤담

춘천에 있는 한 대학에서 특강 요청이 왔다. 작년에 출간한 <엄마를 미워해도 괜찮아>를 주제로 200여 명 앞에서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것이었다. 경남에 살고 있는 내게 춘천은 아마 영영 가볼 일이 없을 것만 같은 도시였는데 정말 뜻밖의 기회로 방문하게 되었다.


그날은 5월 7일, 마친 어린이날 연휴 끝자락이라 남편과 아이까지 총 출동해 출장 겸 춘천여행을 하기로 마음먹고 먼 길을 떠났다. 전날 미리 도착해 레고랜드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그 유명한 춘천 닭갈비도 먹었다. 눈 돌리는 곳마다 '닭갈비집' 간판이 있어 왜 춘천을 닭갈비의 고장이라고 하는지 절감할 수밖에 없었더랬다. 다음날 오후 강연 시간을 기다리며 감자빵까지 야무지게 먹고 강연장에 갔다. 그리고 대학생들을 만났다. 그중에는 아직 여드름 자국이 가시지 않은 앳된 학생들도 있었고, 중년의 만학도들도 있었다. 중간중간 눈 감고 잠을 청하는 이도 있었지만 눈을 반짝이며, 끄덕이며, 조용히 눈물 훔치며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이들을 더 많이 보았다.


떨리는 마음을 안고 진심으로 이야기를 전하느라 마이크를 쥔 오른손에 얼마나 힘을 줬는지 강연을 마치고 난 뒤 차에 탔는데 오른쪽 어깨에 통증이 다 몰려왔다. 잘 마쳤다는 안도감, 대강당에서 내 책을 주제로 떠들었다는 뿌듯함, 해방감... 어떤 기분들이 막 떠올랐다. 그중엔 '아쉬움'도 있었다. 사람들 앞에 선 엄마의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마음이었다.


아직 초등학교 2학년밖에 되지 않은 아이에게 <엄마를 미워해도 괜찮아>라는 주제를 대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나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그 마음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아이가 아직 너무 어리기에... 이럴 때는 아이가 얼른 컸으면 좋겠다.


엄마가 책을 냈다는 사실도 알고, 그래서 북토 크나 강연 같은 공식적인 행사에 참석하는 것도 아는데 대체 그게 무슨 책인지 보여주지도 알려주지도 않으니 아이 입장에선 얼마나 궁금하고 답답할까. 사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이다. 실은 너에게 하나도 감추고 싶지 않았다고, 다 알려주고 너의 생각도 듣고 싶었다고.. 훗날 이 '8살부터 새로 쓰는 육아일기'를 내밀어야지.


얼마 전 같이 TV를 보다가 한 연예인이 '엄마 같은 엄마가 되는 게 꿈'이라는 말을 하자, 아이는 마치 건수를 잡았다는 듯이 내게 물었다.


"엄마의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어?"


이런 질문을 할 때마다 얼버무리는데 아무래도 영 계속 궁금한 모양이다. 아이는 외할머니라는 호칭을 쓰지 않는다. 불러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외할머니와 엄마의 엄마, 분명 같은 사람을 지칭하는 말인데 난 아이의 입에서 나온 단어로 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러니까 나와 엄마의 단절된 관계처럼, 아이도 이미 단절된 어떤 대상으로 인식하는 느낌이랄까. 마치 엄마의 가방을 말하는 것처럼 철저하게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어떤 존재.


아이가 '엄마의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느냐'라고 물을 때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볼록한 아이의 이마를 쓸으며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오묘한 말 밖에는...


"10년쯤 지나면 다 말해줄게."

"10년이나 어떻게 기다려."

"그럼 9년"

"아니 지금!"

"엄마도 말해주고 싶어. 네가 궁금해하는 것에는 다 답해주고 싶어.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네가 어리기 때문이야. 조금 더 큰 뒤에 말하고 싶어. 말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야. 기다려달라는 거야."


삐친 척하는 아이의 고개를 돌려 눈 맞추며 말했다.

"네가 궁금한 것이 있더라도, 상대가 시간이 필요하다고 할 때는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해. 엄마에겐 시간이 필요해. 알지?"


아이의 눈빛에서 조름의 기운이 점차 사그라드는 것을 읽었다.

한동안 아이는 궁금증을 또 삼킬 것이다.

물어봤자 엄마는 대답해주지 않을 테니까.


미안하지만 엄마의 엄마 이야기는 너무 길고 깊어서 지금의 너에겐 이르다고..

어린것이 벌써 다 알고 확인받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고백할게.

<엄마를 미워해도 괜찮아>라는 말의 의미를 네가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자랐을 때 고백할게.

그때 너에게 멋진 엄마로 읽힐 수 있도록 지금 나의 날들을 잘 적어두고 있을게.

그때 들어줘. 읽어줘.


2025.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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