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엄마를 미워해도 괜찮아>를 읽은 친구가 연락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난 너 잘 사는 줄 알았어. 사랑받고 자라서 아이도 잘 키우고, 행복한 줄 알았어. 그래서 네가 부러웠던 적도 많았는데... 너 정말 그렇게 아팠던 거야? 그 세월을 어떻게 견뎠니."
나는 인스타그램 계정이 두 개다. 하나는 비공개 계정이고, 일상의 좋았던 부분을 박제해 두는 용도로 쓴다. 팔로워는 많지 않다. 언젠가 아프고 우울한 날에 들춰볼 사진첩처럼 소소한 행복을 짜깁기해뒀다. 가끔 아프고 우울한 날이면 그 계정의 스크롤을 끝없이 내린다. 작은 폰 화면 안에는 활짝 웃는 나와 아이와 남편이 있다. 스크롤을 아래로 아래로 문지를수록 아이는 점점 작고 통통해지고, 나는 점점 젊고 생기가 넘친다.
그런 날들은 분명 있었다. 그건 거짓이 아니다.
나머지 하나는 작가 필명으로 운영하는 계정이다. 본 계정보다 팔로워도 훨씬 많고 오히려 더 속 깊고 솔직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며 소통한다.
결혼 후 먼 곳에 이사와 살면서 친구들과는 인스타그램으로 서로의 안부를 확인했다. 피드를 통해 내 근황을 확인하던 친구가 출간소식을 듣고 마침내 책장을 넘겼을 땐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지인들에게 나를 어디까지 보여야 할지 몰라서 고민이 많았다. 온 세상에 내 속을 다 드러내고도 정작 나를 아는 이들에겐 내 사연이 되려 부담일까 봐. 그들에게 보였던 씩씩하고 밝았던 모습을 거짓이라 여길까 봐. 혹은 나와 엄마를 공통으로 아는 지인이 책 자체보다 출간 사실을 먼저 알게 될까 봐. 아직 모두에게 고백하진 못했다. 언젠가 글로서, 책으로서 내 존재가 그들에게 알려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니 뒤늦게 <엄마를 미워해도 괜찮아>를 발견한 친구는 얼마나 놀랐을까.
지난 시간들의 짙고 축축한 감정을 쏟아낸 책이 얼마나 낯설었을까. 우울로 점철된 일상에서도 해가 드는 순간은 분명 있었다. 인스타그램이 없었다면 그 시간들은 어쩌면 없던 일처럼 다 휘발되어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의 나는 웃음이 헤픈 사람이다. 장난꾸러기다.
엄마와의 절연, 관계의 애도를 통해 스스로를 찾으면서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긍정적이고 밝은 아이였다. 가끔 실제로 만난 독자들은 글과 다른 이미지라면서 놀랐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글과 실제의 나 두 개의 모습에 가식은 없다. 모두 나의 어떤 부분들일뿐이다.
지난번 강연 말미에서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되게 잘 살아요. 잘 살고 있어요."
대단히 부유하고 세련된 삶은 아니지만, 내 나름 만족하고 안전한 삶을 살고 있다고 덧붙였다.
내 인생의 타임라인을 가만히 듣던 학생들이 절연의 아픔이 영원하다고 믿을까 봐 그게 아니라고 알려주고 싶어서 낯부끄럽지만 그렇게 말했다. 이 또한 명백한 진실이었다.
혼자 숨겨왔던 비밀 같은 마음을 글로 쓰고, 책으로 묶어 세상에 내보낸 뒤로는 더 그렇다.
출간 이후 응급실에 실려간 일도 없다. 원래 이렇게 아무 일 없이 살아냈던 사람처럼 매일을 지낸다.
오늘 같은 일상이 환상처럼 느껴지던 날이 있었다. 그 또한 기록해두지 않았으면 휘발되어 사라져 버렸겠지.
하지만 기억은 책 속에 봉인되어 물건으로 남았고, 나는 이제 그것을 완전히 사물로 인식한다.
젖니처럼 내게서 탈락된 것처럼 느껴진다.
친구에게 정말 후련한 마음으로 답했다.
"나 이젠 잘 살아. 이젠 사람 사는 것처럼 살아. 읽어줘서 정말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