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호평을 받고 있는 드라마 <미지의 서울> 정주행을 시작했다. 주인공인 쌍둥이 자매 미래와 미지, 그리고 호수를 둘러싼 모든 인물들의 관계가 촘촘하게 짜여 있어서 꽤 몰입하며 봤다.
안정적이고 훌륭한 직장으로 평가받는 공기업에 다니는 미래는 주변에서 선망을 받지만 실상은 지옥을 방불케 할 만큼 철저히 따돌림당하는 투명인간 신세다.
엄마의 반찬을 가져다주려 서울로 온 미지는 미래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서로 역할을 바꿔 지내기로 제안하는데.. 드라마는 쌍둥이가 서로의 행세를 하면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로 전개된다.
주인공으로 분한 박보영의 1인 2역 연기는 전혀 거슬림이 없을 만큼 탁월하고, 그 외의 등장인물들의 연기도 모두 훌륭하다. 전개되는 내용의 흐름이나 상황을 타개하는 방식도 전형적이지 않기에 왜 이 드라마가 이토록 입소문을 타는지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늘 본 11화에서 미래, 미지의 엄마 '옥희'와 그녀의 엄마 '월순'이 평생 쌓아 온 오해와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에서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엄마를 미워해도 괜찮아>의 작가인 나의 시선이었기에 더 그랬을까.
손주들에게는 한없이 다정하고 너그러운 할머니 '월순', 그러나 어쩐지 '옥희'의 말투나 표정에서는 엄마에 대한 애증이 물씬 풍긴다. 그래서인지 특히 미지와 월순의 관계는 더 진하고 깊은데, 엄마인 옥희보다 미지가 요양원에 있는 할머니를 더 극진히 모실 정도이다. 드라마 안에서 옥희와 월순 모녀 사이를 비중있게 다루지 않아 짐작만 했는데 오늘 그 서사에 매듭을 확인했다.
어느 날 병세가 악화 돼 섬망이 온 월순은 베개를 끌어안고 '우리 옥희 때리지 말라'며 울부짖는다. 평생 시댁에서 딸 낳아 쫓겨났다는 말로 옥희에게 상처를 준 월순, 사실은 옥희가 그 집에 다시 갈까 봐 모질게 대했다는 한 마디로 지난 세월을 설명한다. 옥희는 시댁에서 쫓겨난 엄마가 자신을 원망하는 줄 알고 늘 죄책감에 시달렸는데... 정신이 돌아온 월순은 딸이 자신처럼 살까 봐 혼자서도 잘 살라고 강해지라고 그랬단다. 그리고 이미 백발이 성성한 채 늙어버린 엄마는 중년이 된 딸의 손을 잡고 한 마디를 기어이 한다.
'미안해'
딸은 그 한마디에 다시 아이가 되어버리고, 눈물보가 터지고 만다. 우는 딸을 월순은 끌어안고 그들이 앉아있는 병실에는 따뜻한 햇살이 든다. 감동적인 음악과 함께...
드라마 밖 현실에 사는 나로서는 지긋지긋한 서사다. 병상에 누워 거동도 불편한 80대 노인이 맨 정신도 아닌 섬망에 의존해 내뱉은 몇 마디 말로 딸은 엄마의 인생을 다 읽는다. 그리고 눈 녹듯 용서한다. 입으로는 용서 않겠다지만 이내 눈빛은 소녀로 돌아가 속수무책 눈물바람을 일으킨다.
끌어안고 우는 모녀로부터 천천히 멀어지는 앵글은 아마 화해와 갈등의 봉합을 얘기할 터다. 그래서 옥희는 정말로 괜찮아졌을까.
독자들과 만나는 자리를 가질 때면 항상 나오는 질문이 있다.
"엄마와 화해는 하셨나요?"
그럴 때면 도대체 난 '화해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서 잠시 머뭇거린다.
네이버 어학사전에 '화해'를 검색하면 이렇게 나온다.
-싸움하던 것을 멈추고 서로 가지고 있던 안 좋은 감정을 풀어 없앰.
-화목하게 어울림.
이젠 엄마에 대한 어떤 감정조차도 남아있지 않는 것 같으니 나는 화해한 걸까. 그러나 화목하게 어울리지는 않는데 화해하지 못한 걸까.
그럴 땐 그저 이렇게 답한다.
"화해를 꼭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분명한 건 지금은 엄마를 미워하지 않아요. 저는 저로서 잘 살아가고 있어요. 엄마도 잘 지내시길 바라요."
뒤이어 또 다른 이가 묻는다.
"엄마가 용서를 구하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이 질문에 대해서라면 더 명확하게 답할 수 있다.
엄마의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너무 듣고 싶은 날들은 분명 있었다. 그 한 마디로 나의 모든 기억과 상처가 치유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그래서 기다렸다. 무수히 많은 날들을 미지처럼 틀어박힌 방 안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선 중환자실에서, 아이를 등원시킨 뒤 혼자 남은 집에서
그러나 그 바람마저도 너무 큰 것임을 아주 나중에야 알았다. 일방적인 기대와 바람으로 엄마를 변화시킬 수는 없는 거였다. 내가 나의 감정이 정당하다고 믿듯이 엄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면 당연했다.
자신의 인생이 가장 불행했던 엄마의 시선으로 본다면 모든 행동들이 '선의'였고, 심지어 '사랑'이었을 것이다. 다만 나는 그 선의와 사랑에 베인 것이다. 엄마 곁에서 느꼈던 통증마저도 사랑이었다면 나는 그저 견딜 여력이 없었을 뿐이다. 지금까지 나의 행보는 엄마를 단죄하거나 바꾸지 않고 그저 멀어짐으로써, 살아보려는 발악이었다. 그 선택은 옳았다고 믿는다.
나이 든 엄마와 끌어안고 '미안하다'라는 말을 들어야만 화해하는 것은 아니다. <미지의 서울>이 틀어진 모녀 관계가 '화해'와 '회복'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클리셰로 사용한 데 대해서는 유감이다. 수십 년간 쌓인 애증은 아름다운 드라마 속 한 장면으로 갈음할 수 없다. 그래서 한참 울고 난 옥희는 속이 후련해졌을까. 억울함은 다 녹았을까. 다른 의문이 들지는 더 생겨나지는 않았을까. 한국의 드라마들은 늘 새로운 콘셉트와 전개방식으로 시청자를 매료시키면서도 어째서 모녀관계에서만큼은 늘 같은 방식으로 결말을 짓고 마는지 안타깝다.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드라마여서 일까. 그렇다면 할 말은 없지만
정말로 솔직한 마음을 고백하자면 난 엄마가 내게 절대로 사과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제는 사과를 바라는 마음마저도 사라졌기 때문에. 용서하고 싶은 마음마저도 휘발되었기 때문에.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 그대로 변하지 않은 채로 잘 지내기를 바란다. 엄마가 변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만에 하나 '월순'처럼 늙어버린 엄마가 온전치 않은 모습으로 내게 "미안하다"라고 한다면 나는 "괜찮다"라고 답할 것이다. 그런 날이 온다면 눈물도 나지 않을 것 같다. 너무 늦은 위선을 증오해서가 아니라 난 정말로 괜찮으니까.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고. '미안하다'라는 그 한마디를 기다리다가 영수증의 잉크가 휘발되어 사라지듯 내 안의 미움도 원망도 날아갔다고 담담하게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