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윤담 Feb 01. 2024

잠깐만요, '천륜'은 자식만의 몫입니까?

정서적 학대받은 사람들을 두 번 죽이는 말

인스타그램 기반의 텍스트형 SNS인 스레드를 얼마 전에 시작했다. 대부분은 평어를 사용하면서 내밀한 이야기를 일상적으로 털어놓는 곳 같아 가벼운 마음으로입문한 것이다.

스레드에는 익명으로 자신의 속 이야기, 상처를 고백하는 사람이 많았다.

나도 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브런치에서 시작했던 것과는 달리 조금 더 정돈된 마음 상태로..


될 수 있다면 나와 같이 부모로부터 정서적 학대의 상처를 가진 이들을 모으고 싶었다.

당신만 힘들었던 것이 아니라고, 여기 나도 있다고. 대나무숲 같은 이곳에서 우리 같이 털어놔 보자고.

반응이 없으면 혼잣말하는 용도로라도 써야지 싶었는데 웬걸.

일주일 만에 800명이 모였다.

나의 담담한 고백 밑으로 각자의 기구한 사연들이 줄줄이 달렸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어른아이들이 있다니. 그 상처들을 가린 채 어른으로 사느라, 또 부모가 되어 사느라 애쓰는 모습이 참 가엽고도 대단해 보였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서로의 글에 '좋아요'와 진심 담은 '댓글'을 달아주며 일주일 사이 꽤나 돈독해졌다. 벌써 익숙한 아이디가 생겼을 정도니 말이다.


나와 나이대가 비슷한 30대뿐만 아니라 40대, 심지어 60대 이상의 스친(스레드 친구)까지 연령대도 다양했다. 나이가 지긋하신 분은 내 엄마 또래임에도 마치 자기 자신의 이야기인양 절절하게 공감하고 안타까워해 주었다. 심지어 남성들도 공감하며 댓글을 달아줘서 놀랐다. 본인의 경험이거나 여동생의 경험을 기억하기에 내 글이 남 일 같지 않더란다.


그러던 중 한 댓글이 눈에 띄었다.


그 시절 엄마들이 다 그랬다.
 어린 가슴에 서운했겠지.
그래도 그 엄마 인생도 불쌍하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엄마들 늙으면 딸이 필요하더라~
그래서 아들만 있는 집은 불쌍하다.
 그래도 '천륜'이라는 게 있는데
조금만 더 참으면 엄마는 할머니가 될 테니
그때 되면 꼬집고 괴롭혀 ^^


댓글이라는 게 누구나 자기 생각을 쓸 수 있는 것이니 그냥 넘어갈까 했지만, 너무 모순적인 내용이라 그러기 싫었다. 그래서 되물었다.


불행한 부모가 아이에게 가하는
정서적 학대는 정당한가?
딸은 부모 노후의 감정쓰레기통이자
요양보호사인가?
아들만 둔 부모는 왜 불쌍한가?
아들은 나이 든 부모를
살뜰히 모시지 않기 때문에?
할머니가 되면 꼬집으라는 건
 늙을 때까지 참고 기다렸다가
복수라도 하란 뜻인가?


심지어 댓글을 단 이는 50대 남자였다.


자신도 아들이면서 아들만 둔 부모는 불쌍하다고 말하는 사람, 자신은 부모에게 어떠한 노력도 가책도 느끼지 않으면서, 늙은 부모에겐 딸이 필요하다고 어르듯 이야기하는 비겁한 사람 이라니. 그가 넌지시 딸의 인내와 희생을 강요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게 아들인 자신에게 이롭기 때문 아닐까. 이런 끔찍한 모순이 정서적 아동학대로 자란 사람들의 자아를 붕괴시키는 것이다.


그가 감히 갖다 붙인 '천륜'이라는 단어도 거슬렸다.

부모의 정서적 학대로 인해
원가정과 자신의 삶을 분리한 사람은
'천륜을 거스른 자'인가.
부모를 버렸다는 뜻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정확히는 버려졌다는 표현이 맞다.

부모는 자식의 지구이다.
대개의 자녀는
자신의 근원인 지구를 저버리고
다른 세계로 도망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곳이
자신에게 가장 안전한 곳일 테니까.


묻고 싶다. 부모라는 지구에서 도망쳐본 적 있는지. 그러한 결심을 해본 적 있는지.

공기도 없는 곳으로, 중력도 없는 곳으로, 햇살도 없는 곳으로 기어이 가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은 감정을 느껴본 적 있는지.


이 세상으로 우리를 소환한 건 부모이다.

왜 어떤 이들은 '천륜'의 책임을 자녀에게만 묻는가.


여느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갈라 치려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지독한 '천륜'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도망친 자들에게 누가 손가락질 할 수 있는가.

'천륜'을 진즉 지켰어야 하는 건 우리를 이 세상에 소환한 부모의 몫이다.


나는 엄마를 사랑했다. 어쩌면 지금이라도 내게 그동안 미안했다는 말 한마디만 해준다면 와락 안겨 울 수 있을 것 같다. 엄마는 나의 지구였다. 그 속에서 함께 영원히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던..

그저 아이였을 뿐이다. (그간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엄마를미워합니다 브런치북을 참고해 주길 바란다.)


엄마와 함께 있으면 자꾸 죽고 싶어 져서, 자꾸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살기 위해 결혼했고, 도망쳤다. 그럼에도 스스로가 너무 싫었다.

세상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할 것 같아 두려웠다.

엄마로부터 도망쳐야만 했던 이유를 매일 밤 노트북 앞에서 울며 적어내려갔던 건

내가 이 세상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는 '천륜 끊은 자식'이 아니라 그저 정서적 학대로 자란 아이일 뿐이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두려움과 무서움, 서러움으로 지새운 수많은 밤을 지나 오늘에 이른 것이다.


누구도 나의 선택에, 나와 같은 상처를 가진 이들에게 손가락질할 자격은 없다.

이해할 수 없다면 지나가면 그뿐이다.


내 부모를 가슴 터지도록 사랑했기에 떠날 수 있었던 거다.

어딘가에 계실 내 부모가 부디 잘 지내시길 바란다. 나는 이제 독립해서 내 인생을 살고 있고, 부모는 저편 어딘가에 있을 뿐이다.


나는 '천륜'을 끊은 것이 아니다.
성인으로서 안전함과 행복을 찾아
독립한 것일 뿐.


자신의 세상 안에 갇힌 엄마를
내가 감히 바꿀 수 없으니
그를 그 자신으로 살게 두고,
나는 '나'로 살길 선택한 것이다.


누구도 정서적 학대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에게 죄책감을 강요할 수 없다.

부디 아픈 기억을 품은 채 살고 있는 많은 이들이 그냥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