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담하게 Jan 31. 2024

까만 엄마 밑에 까만 딸

난 어렸을적부터 까무잡잡한 피부였다. 

피부가 백옥처럼 뽀얀 친구들을 보면 예쁘다는 생각은 했지만 나와 연관지어 크게 부럽다거나

내 피부톤이 부끄럽다고 생각하진 않았던 것 같다. 


성인이 되고 화장을 하면서 한때는 피부톤을 밝아보이게 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지만 워낙 화장엔 소질이 없기도 하고,

내 얼굴을 인위적으로 뽀얗게 만드는것도 어색하게 느껴져 그만두었다. 

지금도 톤업보다는 잡티를 가려주는 정도의 쿠션팩트를 사용하고 있다. 


크면서 까만 피부에 대해 이러쿵 저렁쿵 하는 이야기들을 듣긴 했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았는데(어쩌면 애써 외면했던건지도)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고 보니 주변에서 생각없이 툭툭 던지는 말들이 매우 불편한거다. 싫은거다.


바닷가에서 어떤 아이가 선크림 바르기를 거부하자 그 애 아빠는 이렇게 말했다. 

"너 선크림 안바르면 아프리카 씨껌둥이 된다"

지난 여름 휴가 뒤에 만난 지인은 이렇게 말했다.

"여름동안 살이 너무 타서 농사 짓는 여자같죠?"


내가 까만 피부톤에 속하는 편이라 이런 말들이 고깝게 들리는 것일까?

아니다. 모든 사람은 누구에게나 무해한 말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말 속에 은근한 차별과 편견을, 이제는 의식해야 할때다. 


그들이 까만 피부를 빗대 예를 든 아프리카 사람이나 농부들은 가만히 있다 무슨 봉변인가.


지난 여름 가까운 어른이 우리 아이에게 이런 말을 했다. 

"서울 애들은 하얀데, 왜 이렇게 까맣니? 촌빨난다소리 들을라. 선크림 좀 잘 발라주고, 외출할 때 모자 챙겨 쓰고"


대체 그 촌스러움과 예쁨의 기준은 누가 정한 것인가?

저러한 발언은 염려인가, 비난인가.


유명인의 인종차별 발언은 우르르 비난하기 바쁘면서

일상에서 만연한 외모평가와 컴플렉스 조장에 대해서 생각해볼 예의나 여유는 없는건지.


이렇게 시시콜콜, 어쩌면 나쁜 의도도 없이 내뱉는,

그러나 스스로의 격을 떨어뜨리는 그 말들이 이제와서 새삼 고깝게 들리는건

내가 사유하는 까칠한 어른이 되었기 때문일까. 


까만 내가 낳은 아이도 까만 편이다. 

잘 익은 단팥빵마냥 빵실한 두 볼은 언제봐도 앙 물어주고픈, 너무나 사랑스러운 색이다. 

지나다 보면 백설공주처럼 새하얀 피부를 가진 아이를 만나기도 한다. 

내 아이도 예쁘고, 그 아이도 예쁘다. 

평가하려하지 않는다. 

엄마가 되고보니 세상 그 어떤 아이도 그대로 소중하고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리고 엄마가 되고 나니

자라면서 숱하게 들었던 그러나 외면했던 편협한 말들이

귓가에 날카롭게 꽂힌다. 불편하다. 

되도록 모두에게 무해한 말을 사용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어른이라면 조금 더 생각하고 말하기를,

어른의 언어가 아이의 사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책임감 갖기를, 

있는 그대로 사랑스러운 우리를 인정하기를,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나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이겠지만.


이전 02화 조금 더 씩씩한 엄마가 되기 위해 폭포에 간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