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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담 Feb 27. 2024

딸아, 지금은 낮은 개울에서 놀으렴

첫 아이 초등학교 입학을 고작 며칠 앞둔 지금 나도 물론 그렇지만 내 주변의 엄마들은 모두 초긴장 상태에 비장함이 감돌기까지 한다. 


한글 떼기는 기본 중의 기본, 수학 연산이나, 영어 파닉스, 리딩레벨 등 마주치면 은근히 아이들 레벨을 확인하려 드는 눈치다. 


딸아이의 한글은 유치원을 다니면서 자연스레 터득했고, 영어는 36개월 이후부터 영어영상을 노출시키며 귀를 트여왔다. 요즘은 유치원에서도 파닉스를 가르쳐서 간단한 단어나 문장 정도는 읽는 수준이다. 귀동냥으로 엄마들의 대화를 듣다 보니 그동안 내가 수학에 너무 소홀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핑퐁핑퐁 오가는 대화 속에서 요즘 핫한 수학 연산 문제집의 이름을 기억해 두었다가 처음으로 한 권 주문해 봤다. 


곱셈의 개념을 풀어 설명한 문제집이었는데, 평소 집중력이 나쁘지 않은 아이임에도 엎드렸다가 몸을 베베꼬고, 물을 마시고 온다는 둥, 쉬가 마렵다는 둥 핑계를 대며 자꾸 책상 주변을 맴돌았다. 

그럴수록 내 표정도 점점 어두워지고, 목소리는 점점 강압적으로 변해갔다. 


"산만하게 굴지 말고, 문제를 읽어봐. 6개를 두 개씩 묶으면 몇 묶음이지?"

"스읍"

"자세 똑바로."

"자꾸 이러면 아이스크림 안 준다."


내 말투가 단호해질수록 아이의 입꼬리는 점점 내려가고 미간은 더 좁혀졌다. 

"초등학교에 가면 하기 싫은 것도 앉아서 해야 해. 집중해서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해야지."

본인은 마치 학창 시절에 대단한 우등생이었던 양,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고작 7살짜리에게 늘어놓았다. 

한 귀로 들어가서 한 귀로 나온다는 말이 바로 이런것이로군, 싶을 만큼 아이의 표정을 따분해 보였다. 


고작 10분이나 되었을까. 아이는 아이대로, 나는 나대로 부정적인 감정이 달아올라 폭발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내려뒀다. 

"이거 너무 어려워?"

"응. 너무 복잡해."

"그럼 우리 잠깐 멈추자." 하고 문제집을 덮었다. 


아마도 처음으로 연산문제집을 푸는 아이에게 수준이 맞지 않았던 듯했다. 7세용이었는데 수준을 낮춰 5세용 문제집으로 다시 주문했다. 

로켓배송이 있는 세상은 얼마나 편리한지 바로 다음날 새 책이 날아왔다.


방학이라 종일 놀다 지쳐 심심함을 호소하는 딸에게 5세용 수학 연산 문제집을 내밀었다. 

몇 장 넘겨보더니 만만하게 보였는지 순순히 연필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막힘없이 풀어나갔다. 

"이건 너무 쉬운 거 아니야?"라며 거들먹거리기까지 하는 아이의 얼굴엔 생기가 돌았다. 


진즉 쉬운 것에서부터 시작할걸.. 세상만사가 작은 개울에서 바다로 나아가는 것일 텐데, 앞서나가지 말자고 다짐을 했으면서도 미숙한 나는 또 아이에게 성급한 잣대를 들이댔구나.. 


유튜브에서 많은 교육전문가들이 선행학습의 효용가치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보고, 많은 감명을 얻고 나 또한 그리 하리라 생각했는데, 현실에서는 잠깐 넋을 놓으면 또 이렇게 휘둘리고 말았다.


세간의 말들에 혼란스러울 때는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학창 시절과 회사생활을 거쳐 프리랜서이자 주부로 살아가는 지금, 내게 정말로 필요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높은 레벨에만 치중한 선행이 아니라 차곡차곡 켜켜이 쌓인 삶의 지혜와 좋은 습관이었다. 

어설프게 학원에서 배운 내용이라 다 안다고 치부하고, 정작 수업시간엔 졸거나 다른 생각에 잠겨있던 아이는 다름 아닌 나였다. 알맹이 없이 책 표지 레벨에만 치중하는 것이 아무 소용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아이에게만큼은 지금 수준에서 알아야 할 것을 알려주거나 혹은 더 낮은 것에서부터 성취감을 얻는 방식으로 전하고 싶었다. 


연산 문제집으로 아이의 공부에 관한 정서를 망칠뻔했다고 생각하니 잠시나마 아찔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방향을 잡은 것에 안도한다. 


내가 아이에게 정말 알려주고 싶은 것은 무언가를 매일 하는 성실함, 운동의 즐거움, 음악의 아름다움 같은 것들이지 높은 레벨의 연산이나 높은 성적이 아니었음을 다시금 자각해 본다. 


이미 성실히 잘 커가고 있는 아이에게 벌써부터 공부에 대한 압박으로 관계를 망치지 않기로 한다. 

낮은 개울에서부터 즐겁고 해맑게 바다로 나아갈 수 있기를 나는 그저 지치지 않고 응원만 해주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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