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2015 한국영화, 외국영화 베스트 5
이미 새해가 밝아 늦어버리기도 했고 작년에는 유난히 챙겨보지 못한 영화들도 많아서 그냥 넘길까도 했지만, 그렇더라도 한 해 동안 본 영화들을 정리하는 것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어 올리기로 했다. 브런치에 관련 내용을 올렸었던 작품들의 경우에는 짧게 넘어가기도 했고, 하고 싶었던 얘기들이 좀 쌓여있던 작품들의 경우에는 생각보다 길어지기도 했다(공교롭게도 외국영화들은 전부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는 작품들이다. 불성실...) 그래도 역시 한번 정리하고 나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부디 2016년에는 이렇게 밀린 숙제하듯이 말고 조금씩이라도 미리 써둘 수 있기를 빌며...
본 글에는 다수 영화에 대한 내용 누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경험에 직접 개입하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영화
올해도 어쩔 수 없다. 홍상수 감독이 매년 영화를 찍는 한 계속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올해도 1위는 홍감독의 신작,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이다. 그가 한 편의 영화 안에 엇비슷한 이야기 두 개를 접붙여 놓고 동시에 바라보도록 할 때, 이는 더 이상 실험적인 시도라거나 우연의 결과를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다. 시도라기 보단 '의도'의 구현이며, 말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 결과물은 다분히 '의도적인 우연'이다. 이 영화가 안겨주었던 새로운 영화적 체험에 대해서는 일전에 브런치에 올렸던 글(아래 링크)에 더 자세히 적어 둔 바 있으니 짧게 줄인다. 매번 기대하지만 늘 그 기대 이상의 탄복을 자아내게 하는, 이 장인의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영화에 주먹질을 담기 좋아하던 감독은 이제 주먹질에 세상을 담는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느낀 통쾌함은 내러티브 자체에서 오는 것도 있었지만, 류승완 감독이 자신의 스타일을 그대로 밀어붙이면서 이런 멋진 작품을 내놓았다는 데에서 오는 것이 더 컸다. 그의 최고작이라 일컬어지던 <부당거래>는 높은 완성도의 나무랄 데 없는 작품이었지만, 그의 필모그래피 내에서 눈에 띄게 액션의 비중이 적은 의외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그가 대중적·비평적으로 가장 큰 호응을 받았던 작품에 '맞짱' 신이 많지 않았다는 사실은 팬의 입장에서 괜히 섭섭한 부분이었다(니가 왜?). 하지만 이런 쓸데없는 아쉬움은 이번 <베테랑>으로 말끔히 씻겨 내려갔다. 이 영화는 몸과 몸의 부딪힘을 통해 세상의 부조리함을 호쾌하게 고발해낸다. 류승완 감독이 천만 감독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는데(팬이라며...), 감독의 영화 세계를 이어가면서 대중들까지 만족시킨 이 작품이 개인적인 2015년의 한국영화 두 번째다.
장소의 공기가 영화로 옮겨지는, 그 사이에 부는 한 줄기 시원한 바람
큰 기대 없이 들어간 극장에서 멋진 영화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 그 소중한 기분을 느끼도록 해 준 이 작품을 3위로 꼽았다. 장소 취재 형식의 1부와 이를 토대로 찍은 여행 영화로 추정되는 2부로 구성된 영화의 독특한 구조는 단순히 영화 제작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 이상의 효과를 만들어낸다. 마치 직접 가보고 경험한 장소를 스크린으로 보고 있는 듯한 기시감과, 그 장소 안에서 영화 속 인물 또는 스태프의 일부가 되어 창작에 참여하고 있는 듯한 긴장감, 그리고 내러티브 자체에서 오는 여행과 만남의 설렘까지... 복잡미묘한 감정들이 동시에 느껴졌다. 이 영화의 방점은 1부도, 2부도 아닌 그 '사이'에 있다. 영화라는 매체를 기타 매체, 특히 연극과 구분 짓도록 하는 중요한 차이점 중 하나는 '현장 로케이션'이다. 영화의 소중한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바로 그 지점을 이 영화는 유려하게 꿰뚫는다.
전작에 비해 리듬감은 조금 덜해졌으나 안정감과 일관성은 더해진 느낌. 어쨌든 재밌고 귀엽다
이광국 감독에게 홍상수 감독의 조감독 출신이라는 타이틀은 일장일단의 꼬리표였을 것이다. 그의 데뷔작 <로맨스 조>는 꽤 후한 비평을 이끌어냈었으나 늘 그의 스승에 대한 언급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곤 했었다. 두 번째 작품이 이렇게 긴 간격을 두고서 나오게 된 것은 물론 제작 여건 상의 어려움도 있었겠지만 그 부담감의 영향도 작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심기일전한 그의 신작에 보다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전작에 이어서 그는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라 이름 붙일만한 자신만의 새로운 장르를 유쾌하게 개척해낸다. 여러 개의 이야기들을 적당히 섞은 뒤 재배열(이 배열은 층위도 구분 짓는다) 하는 것. 이는 서사를 해체시키고 모호하게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는 이야기들의 구분이나 대조보다는 '연결'에 관심이 있고, 그 지점이 뚜렷하게 드러난 이번 작품은 특히 홍 감독이 형식적 실험을 시도해온 작품들과 구분된다. 개인적으로 전작에서 느껴졌던 독특한 리듬감의 감흥이 살짝 덜했다는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그래도 이광국 감독이 구축한 '이상한 나라' 이야기는 여전히 신선하고 흥미롭다.
이 영화를 두고 온갖 반응들이 신랄하게 쏟아진다면 그야말로 감독이 의도한 바에 부합하는 결과일 것
어쩐지 항상 5위를 가장 고민하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고민의 끝에선 결국 작품성보다는 '취향저격'의 손을 들어주는 편이다. 부산에서 보고 단번에 마음을 빼앗겼던 이 작품은 한국 사회 특유의 요란한 빈 수레와 같은 '반응'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비춘다. 이 영화에 대한 평들 중에는 산만하게 떠들지만 중심이 없어 보인다거나, 무책임하게 '모두 까기'만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 지점이 이 영화의 핵심이라 생각한다. 국가적 사건이나 커다란 스캔들이 있을 때마다 그저 흔들고 흔들리기만 할 뿐 중심이 없는, 익히 보아왔던 그 모습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선인간'이라는 생소한 소재를 아주 익숙한 한국 사회 한복판에 툭 던져놓는 발상은, 함부로 비교하긴 어렵겠지만 봉준호 감독의 <괴물>을 떠올리게 한다. 이전 글에서도 적었듯이 <괴물>이 '대응'에 대한 영화라면 <돌연변이>는 '반응'에 대한 영화다. 작은 규모로 개봉하고 주목도도 적었던 이 영화에 대해 위의 한줄평에 적어 둔 것과 같은 '신랄한 반응'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꼭 이 훌륭한 데뷔작이 재평가되리라고 믿는다. 권오광 감독의 차기작이 무척 기다려진다.
오, 영화!
개인적인 2015 최고의 외국영화는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택시>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등의 감독의 전작들을 미처 챙겨보지 못했어서 감흥이 보다 컸던 것일 수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그의 꿋꿋한 영화적 태도에 압도되어 마지막 장면에서는 전율까지 느껴졌다. 정치적 외압으로 이란 국내에서 영화 촬영이 금지된 감독은 택시를 타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똑똑하고 귀여운 조카를 비롯한 일반인 배우들과 함께 페이크 다큐 형식의 이 영화를 완성시켰다. 영화는 택시를 따라 테헤란 시내 곳곳의 장면들을 포착하며 이를 통해 이란 사회의 면면들을 견고하고 높은 밀도로 보여준다. 그리고 거기엔 택시 앞에 달린(또는 조카의 손에 들린), 장면들을 담고 있는 '카메라'에 대한 깊은 사유까지 들어있다. 스스로를 쉽게 정의라 자부하거나 정당화하려 들지 않고, 창작 행위 자체의 정당성과 위험성(여기서 위험성은 개인의 안위에 대한 것이 아닌, 예술 매체가 가질 수 있는 왜곡에 대한 것을 말한다)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하는 감독의 태도는 얼마나 존경스러운가. 시종 특유의 미소를 잃지 않고 소박하고 담담한 태도를 견지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흠뻑 매료되었다. 결국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건 확신과 독단보다는 고민과 겸손일 것이라 믿고 싶다, 아직은.
'누가 이 세상을 망쳤지?', 노장 남성 감독이 액션 영화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니, 경의를
2위 영화에 대해서도, 조지 밀러라는 훌륭한 감독의 영화적 태도에 대한 찬사가 감상의 대부분이 될 것 같다. 일흔의 노장, 남성 감독, 액션 영화. 이 조합에서 이렇게 페미니스틱한 영화가 나올 것이라고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끊임없이 질주하는 이 영화는 퓨리오사라는 여성 캐릭터에게 그 질주의 키를 쥐어준다. 익히 보아온 액션 영화들에서 약자, 피해자, 반전 도구, 기껏해야 조력자의 위치에만 머물렀던 '여성'에게 말이다. 더구나 그녀의 질주의 목표는 여성들 간의 연대를 기반으로 여성에게 강요된 역할, 즉 모성 신화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영화가 제시하는 다소 과격한 질문은 영화 속 대사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누가 세상을 망쳤지?" 유구한 역사 속에서 항상 키의 주인이었던 남성들은 이토록 망가진 세상에 대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이는 남자인 나도 충분히 동의하는 사실이지만, 노장 남성 감독이 찍은 액션 영화에서 이런 질문과 맞닥뜨리니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영화는 심지어 '워보이'라 불리는 인물군을 통해, 허약한 남성성의 허상까지 까발린다. 권력자가 다수의 남성들에게 충성이라는 환상을 주입하고 폭력을 정당화시켜 이용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다(워보이라는 작명은 참 직접적이다). 여성과의 만남으로 차츰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워보이 눅스는 페미니즘이 왜 남성들에게도 가치 있는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캐릭터다. 아쉽게 올해의 한국영화 순위에 포함시키지는 않았지만 썩 좋아했던 최동훈 감독의 <암살>은, 안옥윤이라는 멋진 여성 캐릭터를 영화 전면에 내세웠지만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가 당당히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힐 기회를 빼앗는 우를 범했다. 다행히 <매드 맥스>에는 그런 헛발질이 없다. 총을 든 퓨리오사에게 맥스가 조용히 어깨를 내어주는 장면은 이 영화의 태도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끔찍한 진실의 무력함, 진실의 끔찍한 무력함
장르영화가 가장 극단적으로 현실에 맞닿은 결과가 바로 이 영화일 것이라 감히 생각해본다. 영화의 주제 자체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진실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에 대해서이니, 영화의 내용과 형식이 딱 맞아떨어진다고도 볼 수 있겠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이미 전작 <그을린 사랑>에서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탁월한 능력을 선보인 바 있었는데, 이번 영화가 선사하는 사실감은 전작과 비교해서도 월등하다. 가상의 공간을 생생한 현실로 납득시킨 전작의 성취도 물론 뛰어났지만, 이번 영화는 매우 장르적인 인물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등 외견상 철저하게 장르영화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사실적이기 어려운 조건이라 생각한다. 또한 이번 영화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순간순간의 과감한 시점 전환이다. 잘못했다간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그러한 전환 지점들이 놀랍게도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사실'이란 것이 사실, 한 가지 시점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시선의 방향과 거리를 일관되도록 통제하여 관객들에게 사실감을 전달하고자 시도한 여타 영화들의 일련의 노력들을 이 영화는 간단히 배반한다. 그리고선 웬만한 다큐멘터리나 고발 영화보다 훨씬 더 사실적으로, 무력한 진실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전달해내니 혀를 내두를 수밖에.
조용히 파국을 관찰하는 시선, 나지막이 강렬한 연기
연초에 이 영화의 놀라운 연출과 배우들의 놀라운 연기를 두 눈으로 확인한 뒤, 친구에게 이미 올해의 연출, 올해의 연기를 다 본 것 같다며 흥분한 채 떠들었던 기억이 난다. 음악이 거의 쓰이지 않고 대사마저 적은데도 불구하고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팽팽한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세 주연배우들은 장황한 대사 없이도 인물들의 감정선을 납득시키고, 감독은 대사와 음악 없이도 차분한 장면 장면의 연출을 납득시킨다. 그렇게 성실히 '사건'의 계기들을 쌓아가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훌륭한 미덕이라 생각한다. 덕분에 충격적인 엔딩 이후에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난 뒤에도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했었다. 실화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임팩트가 강한 사건이기 때문에 영화는 자칫 이를 그저 재연하는 수준에만 머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장인들의 놀라운 솜씨는 이야기 자체가 가진 힘을 훌쩍 뛰어넘는 멋진 결과물을 직조해냈다. 자본의 광기에 미국의 역사를 대입시키는 깊은 은유까지 읽어내기엔 내 역량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이를 차치하고서도 충분히 놀라운 영화적 체험을 안겨준 깊은 여운의 작품이다.
인물의 감정을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아내는 감독의 솜씨. 생각을 지우고 몰입하게 된다
외국영화 쪽에서도 5위는 작품성보다 '끌림'을 우선으로 선택했다. 스타일리시한 미장센과 감각적인(물론 종종 과하다고 지적되는) 음악, 다소 감정과잉으로 보이는 어딘가 결핍된 인물들. <마미>는 자비에 돌란 감독의 영화들을 관통하는 이런 특징들이 여러모로 극에 달한 작품이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이 영화를 지지한다. 어째서인지 돌란에 대한 비평은 작품이 나올수록 점차 극과 극으로 갈라진다는 인상이다. 특히 초기작들에서는 '젊음', '패기' 등의 수식어들과 함께 장점으로 칭찬받던 부분들이 언젠가부터 단점으로 지적받게 된 것 같아 의아하다. 내가 보기에 그의 영화들은 그저 꾸준하게 그다웠을 뿐인데 말이다(물론 나도 그 안에서 호불호가 갈리긴 하지만 그의 영화 특유의 특징들에 대해서는 항상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편이다). <마미>에서 사용된 독특한 1:1의 화면비에 대해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듯한데, 개인적으로는 이 새로운 영화적 시도 역시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마스킹 기술이 화면비의 변화를 제대로 따라갈 수만 있었어도 훨씬 더 큰 감흥을 불러일으켰을만한 신선한 기법이라 생각한다. 뻔뻔스러울 정도로 세련된 스타일에 대한 집착을 고수하는 이 패기만만한 감독이 세간의 지적들에 아랑곳 않고 계속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깝게 순위에 포함시키지 못한 영화들. 전에 적어두었던 한줄평들만 옮겨 본다.
마돈나 _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여성 감독이 고쳐 찍은 <사마리아>.
산다 _ '생존은 나의 것', 돌고 도는 생의 절박함과 지독함.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_ 성실한 이 세상에서 몇 명을 죽이면 사랑하는 이와 편안한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더 랍스터 _ The Lobster _ 커플이 되려면 '나'를 버리고, 솔로로 남으려면 '인간'을 버리라니, 밑도 끝도 없이 차가운 우화.
이민자 _ The Immigrant _ 고전적인 우아함 속에 담아낸 타지에서의 여성 고행기. 여기라고 다를까? 지금이라고 나을까?
침묵의 시선 _ The Look of Silence _ 피해자의 침묵과 가해자의 소음. 지금 우리의 현재도 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