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부거 Oct 11. 2021

통화녹음파일

(feat. 나만의 팟캐스트)

 혼자 있을 때 의식적으로 하는 일이 있다. 친구들에게 전화를 거는 일이다. 직접 만나기에는 좀 멀고, 카카오톡 메세지로 묻기에는 좀 더 가까운 관계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자주 한다. 전화를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내 삶에 꽤나 큰 영감이나 힌트를 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목소리에만 의지해 나누는 전화 통화의 경우, 아무리 큰 영감과 힌트를 받았다고 해도, 직접 만나 나눈 대화보다 좀 더 가벼이 증발되는 경우가 많았다. 눈에 보이지 않아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친구와 통화를 하고 나서 메모장에 통화 내용들을 적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부지런하지 않은 사람인 탓에, 시간이 지날수록 기록하지 않는 전화 통화들이 늘어갔다. 부지런하진 않으면서도, 또 하기로 한 것을 하지 않으면서 쌓이는 죄책감의 무게를 느끼는 사람이기에, 결국 다른 방법을 찾았다. 통화를 녹음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이렇게 하나둘 녹음된 파일들이 핸드폰에 리스트를 형성하며 쌓여있다.


 종종 지하철을 타고 가거나 버스를 타고 갈 때, 무언가를 듣고 싶은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저장해둔 통화 녹음 리스트를 살펴본다. 


  - 20111025_김대*과의 대화

  - 20120916_이*훈과의 대화

  - 20121025_*정*와의 대화...


녹음 리스트 중 하나를 선택해서 듣는다.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통화녹음파일을 들으면서, 상대방과 나눈 대화를 다시 한번 곱씹어 본다. 바둑처럼 복기를 해본다. 좀 더 나은 말을 두기 위해서. 한번 둔 말을 되돌려보기도 하고, 다른 길은 없었는지, 다른 말을 내세울 수는 없었는지, 꼭 그 공백을 메웠어야 했는지를 스스로 점검해본다.


 내 말을 곱씹을 때와 상대방의 말을 곱씹을 때는 집중하는 부분이 조금씩 달라진다. 

 내 말을 곱씹을 때는 (내 목소리가 왜 이렇게 이상한 거야?라는 직감과 손발이 오그라듦을 잘 버티고 나면, 누구나 자신의 말을 곱씹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나는 왜 저 상황에서 저런 말을 했을까? 내가 많이 조급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는구나. 침묵이 필요한 순간이었는데, 공백을 못 참고 뭔가를 채우기 위해 말을 던졌구나. 좀 더 말을 천천히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등등 좀 더 부족한 면에 집중한다. 부족하거나 부정적인 면에 집중해 좀 더 나아져야 할 부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생각해본다.


 반면에 상대방의 말을 곱씹을 때는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많이 보려 한다. (친구들의 목소리를 허락 없이 녹음하고 간직한 미안함에 대한 반대급부적인 행동인지는 모르겠다.) 그들이 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이 얼마나 내게 고마운 존재들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고, 그들이 내게 해 준 이야기들을 어떻게 하면 내 삶에 실제로 적용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진다. 또 내가 그들에게 한 말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슨 행동을 행해야 할지 고민해본다. 


 내게 말을 걸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건너편에서 누군가가 내 말을 들어주며 숨을 내쉬고 있다는 것이,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한다는 하나의 신호 같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나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아무도 (심지어 나 조차도) 모를지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하던 때였다. 하지만, 통화녹음파일 안에는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었고, 말을 하는 내가 있었다. 과학적으로도 내가 존재한다고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생긴 셈이다. 내 존재감을 지탱해주는 소리가 그 안에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온 힘과 진심을 다해 자신의 육성으로 "너 잘하고 있어!"라고 말해주는 소리가 내 귀에 안착하는 순간, 나 스스로 잘하고 있다는 착각과 깊은 안정감에 빠질 수 있게 된다.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한 사람의 목소리를 온전히 저장해 두고, 그것을 필요할 때마다 꺼내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고마운 일인지 실제 들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할 것이다. 내 자존감을 지탱해주는 소리가 그 안에 있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증거와 스스로에 대한 응원이 필요할 때, 플레이 버튼 하나면 되었다. 디지털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걸 체감하며 감사함을 느꼈다.


 요즘도 나는 버스를 타고 가거나, 집에 혼자 누워 있을 때, 산책을 할 때면 핸드폰을 꺼내 이어폰을 귀에 꼽고 통화녹음파일을 재생한다. 내용은 다르지만, 형식은 비슷한 팟캐스트를 떠올리며, '요즘 사람들이 이래서 팟캐스트를 자주 듣겠구나'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게스트로 나오는 팟캐스트, 때로는 좋은 정보를 제공해주기도 하고 때로는 토닥임과 다정함을 건네주는 팟캐스트, 남들은 들을 수 없는 하나뿐인 팟캐스트, 통화녹음이 담긴 파일을 듣는다는 건 내게 그런 의미다.

이전 02화 목소리 히어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