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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거 Oct 10. 2021

목소리 히어로

"혹시 예전에 베니건스에서 일하지 않으셨나요?"


2017년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도서전 부스 앞을 한참을 서성이던 나는 겨우 용기를 내어 부스에 앉아있던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네. 근데 누구시죠?.......오! 진짜 오랜만이다. 근데 어떻게 나일줄 알았어?"

"아 지나가다가 목소리가 들렸는데, 누나 목소리인거 같아서요."

"내 목소리가 그렇게 특이했나?(웃음)"


베니건스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때가 2005년이였으니, 누나를 다시 만난 건 12년만이었다.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일을 하면, 개개인의 성향마다 조금 다르겠지만 생각보다 서로 많이 친해지게 된다. 일이 힘들고 손님이 힘들어서 그리고 뭉치고 싶어하는 젊은 에너지들이 있었다는 것이 이유인 것 같다. 


하지만 누나와 나는 일할 당시에도 엄청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누나를 알아봐서 더 놀랐던 것 같다. 너무나 오래기도 했고 우연히 만났다는 행운 같은 느낌에 누나와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누나는 자기 목소리가 특이하지 않은데 목소리로 자신을 찾았다는 것이 신기한듯 이야기했다. 그 순간 나는 누나의 목소리가 정말 특이했던 건지를 설명할 자신이 없었고, 시간을 들여 설명한다고 해도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약간 어색해하며 민망한듯 웃어넘기고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집으로 오는 길에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누나의 말대로 누나의 목소리가 엄청 특이한게 아니라면, 그리고 12년이 지난 지금도 내가 그 평이한 목소리를 기억한 게 신기한 일이라면, 내 재능은 사람의 소리를 듣고 기억하고 구별할 수 있는 것에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다다랐다. 


평소 나는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에 대해 알기가 힘들었다. "무엇을 잘하는가?"라는 질문을 마주서기도 힘들었을 뿐 아니라 마주 선다면 어디서부터 답변을 해야하는지 감조차 잡기 힘들었다. 그리고 어디에서 들은 이야기인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자기가 잘하는 것을 스스로 찾아내기 힘든 이유는 설사 남들이 하기 어려운 것들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 능력이 스스로에게 쉽다고 인지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기가 쉽게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분별하는 건 어느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누나의 반응이나 주변에 이 에피소드를 들려줬을 때 지인들의 반응이 신기하다고 할 때마다, 이것도 하나의 능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금껏 한 번도 이렇게 생각하지 못했던 이유에 대해 생각해봤다.


보통 누구보다 무엇을 잘한다는 것을 결과와 연결시켜 생각해왔다. 전교 1등, 전국 1등, 세계 1등. 이런 결과가 없으면 잘 한다고 얘기가 어렵다고 생각해왔다. 목소리를 구별하고 기억하는 능력을 겨루는 대회는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생기지 않을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또 가끔 영화 속에서 전화를 통해서 납치범의 목소리를 들었던 형사가 '우연히' 슈퍼마켓에 들렀다가 먼저 계산하던 사람의 목소리가 전화를 통해 들은 납치범의 목소리와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검거에 성공한다. 사람들은 형사의 '듣기 능력'에 귀 기울이기보다, 영화적 우연성에 좀 더 많은 귀를 기울인다. 아주 우연한 일들에 형사의 능력이 가려지고 묻힌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는 수 많은 능력을 가진 히어로들이 존재한다. 배트맨, 슈퍼맨, 앤트맨 등등. 나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또 한 명의 히어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목소리는 들숨과 날숨을 통해 숨을 쉬는 작용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폐로 들어간 호흡이 다시 빠져나오면서 후두를 거쳐 성대를 통과할 때, 성대의 근육이 서로 부딪혀 떨리면서 만들어진다고 한다. 성대는 호흡을 위해 열려 있다가 '하' 하고 단순히 숨을 내쉴 때는 성대 진동이 없고, '아' 하고 소리를 내면 비로소 성대가 진동한다. 호흡을 할 때에는 성대가 열려 있다가 말을 하기 위해 성대가 닫히면서 진동해 소리가 나는 것이다. 사람마다 성대의 생김새가 달라짐으로 목소리가 달라진다고 한다. 어쩌면 나는 사람들의 성대 모양의 차이를 보지 않고도 구별해 낼 수 있는 단 한명의 목소리 히어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가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말을 할 때, 신체 구조 중 뇌와 가장 관련이 깊다고 생각을 한다. 실제로 뇌 안에 해마라는 부분에서 기억을 담당한다고 알려져 있다. 작게는 영어 단어를 기억하는 것에서부터,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는 문장을 기억하는 것 그리고 '전남 고흥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시원한 맥주를 마시던 장면' 같은 이미지를 기억하는 것 모두 뇌의 해마라는 부분으로 들어갔다 나오며 그것들을 끄집어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근데 소리를 기억하고 다시 끄집어내는 영역은 왜인지 모르게 해마가 아닌 다른 어딘 것 같은 직감이 든다. 눈을 감고 누나의 목소리를 기억했던 그 순간을 떠올려보면, 귀 안쪽 어디에선가 차곡차곡 쌓여있던 목소리를 하나둘 뒤적거리며 누나의 목소리를 찾았던 것 같다. 실제, 뇌에서 청각 정보를 담당하는 영역은 측두엽에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마도 나는 해마와 측두엽의 시너지를 세상에서 가장 잘 해내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공기가 없는 진공 상태에서는 아무리 고함을 쳐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물체가 떨리면서 만들어진 음파를, 우리 귀까지 공기가 전달해줘야 소리라는 것을 듣게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공기가 없으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히어로인 것이다. 살아 숨쉬는 것 만큼이나, 내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공기가 없으면 안 된다. 토르에게 망치가 없다면 히어로가 아닌 듯, 내게 망치는 공기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어린왕자의 말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목소리도 공기도 눈에 보이지 않으니, 중요한 무언가가 될 수 있는 자격은 충분히 갖추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런 중요한 무언가를 다른 이보다 잘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히어로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논리적 모순이 적지 않을까 생각해본다.(논리적 모순은 없어야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지만, 논리적 모순이 적다는 것으로 그나마 나의 의지와 마음을 표현해본다.)


누나의 목소리를 알아차린 후부터 누군가가 "넌 뭘 잘해?"라고 물을면, "나? 난 소리를 잘 들어."하고 자신 있게 말한다.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여러 번 반복하다보니, 정말이지 내가 누군가와는 다른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 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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