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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적 Feb 01. 2023

1인 워크숍 | 부산 영도 비건 식당 아르프(arp)


부산 여행을 결정한 후 가장 먼저 고려한 일정은 영도에 위치한 비건 식당 '아르프(arp)'에 방문하는 일이었다. 부산행 KTX 티켓을 예약할 때도 부산역과 식당의 거리, 소요 시간을 고려했고 첫날의 일정도 일부러 영도로 잡았다. 불안하지 않게 앱으로 미리 예약도 해두었다. 여긴 뭔가 특별해 보였다. 꼭 가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sns를 통해 접한 이미지가 감각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쌀와인을 직접 제조해 판매한다는 점이 심상치 않았다. 모든 비건 식당이 존재 자체로 소중하고 특별하지만,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서울역에서 아침 9시에 탄 KTX 기차가 두 시간 십오 분 만에 부산역에 도착했다. 수도권은 한창 한파로 떠들썩했던 오전이었는데 부산에 오니 냉기마저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짐 보관소에 짐을 맡기고 가벼운 발걸음과 함께 영도로 출발.





영도로 향하는 버스. 햇살은 유난히 따스했고 부산 특유의 바다와 도시가 어우러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부산은 부산만의 분위기가 있다. 더 오래 타고 싶었는데 너무 가까워서 아쉬웠을 정도.





봉래시장 근처 골목길에 위치한 아르프(arp).


심플한 내부 공간과 시원한 통창, 큼지막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적절하게 감각적인 느낌. 내가 기대했던 딱 그 모습 그대로였다. 혼자라서 티는 못 냈지만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던 순간.





매장에 들어섰다. 공간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가구와 오브제들이 참 정갈하고 예쁜 모습. 그래 난 이런 취향이었지. 갑자기 잊고 지내던 취향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어디에 앉을까 두리번거리다 창가의 작은 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았다. 모든 게 깔끔 그 자체네. 식기류도, QR코드로 보는 메뉴판도.





친절한 직원분께서 바로 따뜻한 웰컴티를 내어주셨다. 그래 뭐 향긋한 차겠지. 라고 생각하며 한 모금 맛을 보는데 갑자기 신세계가 들어왔다. 이 달큰하고 향긋한 향은 무얼까. 홀짝홀짝 들이켰다. 설탕을 넣은 건 아닐 텐데 왜 설탕 맛이 나는 것 같지.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차의 맛이었다. 궁금해서 검색해 보니 무화과 잎차였다. 원래 무화과 잎차에선 코코넛 향이 나는가 보다. 참 신기한 일이네. 무화과를 먹을 땐 한 번도 코코넛을 떠올린 적이 없는데. 그래서인지 이곳의 웰컴티는 꽤나 유명한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 울퉁불퉁하게 굴곡져 비쳐 보이는 잔의 투명한 빛이 너무 예뻐 카메라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여태껏 차보다 커피를 선호했던 이유 중 하나는 커피가 주는 꽉 찬 느낌이었다. 괜히 그런 느낌이 들었다. 탁하고 어두운 갈색에 씁쓸한 맛과 고소한 향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에 비해 차의 투병한 여백은 너무 텅 빈 느낌이었다. 허전했다. 어떤 차를 마셔도 커피보다는 별로였다. 그런데 이 코코넛 향은 커피보다 윗길인 것 같은데.





혼자라서 좋은 점은 공간의 분위기를 한 눈 팔지 않고 모두 기억하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창밖 건너편 건물에 붙여진 식당의 포스터는 꼭 패션 브랜드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감각적이고 미니멀하고 섬세한 자연스러운 컨셉. 사소한 것 하나조차도 무심하게 지나쳐지지 않을 때 나는 '브랜딩'을 경험한다. 그리고 진정성이 더해질 때 애정을 느낀다. 여긴 그냥 식당이 아니었다. 브랜드다. 부산의 로컬 브랜드이자 비건 브랜드.





이 글을 읽어내리며 나의 찬양이 조금 과하다고 느껴진다면, 그건 당신이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인 고사리 파스타를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사리 페스토와 고사리, 팽이버섯과 연근칩, 처빌이라는 허브에 레몬. 정말 군더더기가 없는데 충분한 한 그릇 음식의 재료들이었다. 딱 이 정도의 비주얼도 마음에 들었다. 흘러내릴 듯 화려한 비주얼도, 어딘가 돈이 아까워지는 심플함도 아닌 적당한 먹음직스러움.





한 입 먹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있다. ‘아니 이 맛있는 걸 여태 부산 사람들만 먹은 거야?!’. 이걸 비건 지향 2년 차가 넘어서야 맛 보다니. 맛도 보는 그대로였다. 고소하고 담백한데 느끼하지 않았다. 버섯은 바삭하고 고사리는 촉촉했다. 얇은 면은 씹기에 좋았고 적당히 잘 익었다. 혼자라서 아쉬운 건 다른 메뉴를 맛보지 못했다는 점뿐이었다.





나에게 이렇게 빠른 파스타 흡입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비건을 지향하지 않을 때도 크림 파스타를 0.5인분 이상 먹어본 적이 없을 만큼 느끼한 맛에는 유난히 약한 체질이었다. 성급하데 먹고 쉽게 체하기 일쑤였다. 요즘은 양도 줄었다. 편향적인 시골밥상파다. 파스타는 내게 다소 소화가 쉽지 않은, 다 먹기엔 부담스러운 음식이었다. 일반 레스토랑에서 비건 파스타를 먹으려면 유일한 선택지가 알리오 올리오뿐인데, 대체로 기본 메뉴에 정성을 쏟는 일은 흔치 않다. 그래서 만족감은 늘 그럭저럭이었다.


다 먹은 나도 신기했고 다 먹고 더부룩하지 않은 것도 낯설었고 너무 빨리 다 먹어버린 것도 아쉬웠다. 혼자라서 다 먹고 가만히 앉아있기는 좀 어색한데 금세 잃어서고 싶지 않았다. 왜 이렇게 빨리 먹었을까.





아쉽고 맛있어서 웰컴티는 네 잔이나 마셨다. 배가 부르니 메시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To reduce the pain of other beings. 다른 존재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하여. 진정성 있는 메시지가 감각적일 때 포텐이 터지는 법이지. 그러고 보니 arp는 around plants의 약자였다. 비건 식당이라는 본질에 충실한 이름이었네.





웰컴티와 쌀와인이 판매 중이었는데 가격이 약간 부담되어 고민하다 내려놓고 왔다. 그게 이 여행에서 가장 아쉬운 나의 선택이 되었다. 내내 후회 중이다. 과거의 나야 왜 그랬니. 무화과 잎차는 사 왔어야지. 너도 참..



아무튼 여행의 시작은 아르프 덕분에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만족감으로 가득 차 중간에 일정이 틀어지더라도 약간은 용서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돌아서는 발걸음이 아쉬워 마지막 날 한 번 더 올까 고민하며 버스를 탔다.


이거봐 비건으로도 충분히 쾌락적일 수 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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