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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적 Feb 02. 2023

1인 워크숍 | 영도 해안 길 따라 플로깅



아르프(arp)에서 배를 채우고 찾아간 곳은 흰여울문화마을이다. 바닷가 옆 크고 작은 상가들이 즐비해 볼거리가 많아 관광지로 유명한 동네였다. 사실 난 무슨 무슨 마을이라고 이름 붙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지 않는 건 벽화마을인데, 누군가가 일상을 보내는 터전을 구경 간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동네를 볼거리라며 찾아온다면 난 기쁠까, 불쾌할까. 아무래도 난 후자 쪽 일 것 같았다. 그럼에도 흰여울문화마을을 가기로 결정한 이유는 작은 빈티지샵들이 많고 가보고 싶은 책방이 있고 바다가 있기 때문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빈티지샵을 찾아가다 발견한 풍경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저 멀리 보이는 바다. 도대체 바다는 왜 이렇게 사람에게 설렘을 주고 탁 트인 여유마저 가져다주는 것인지. 순식간에 여기가 그리스고 이탈리아인 기분.





정말 절경이었다. 빈티지샵 찾는 것에 몰두하느라 이렇게 근사한 풍경을 만나리라 기대하지 못했던 덕일까. 내리쬐는 햇살과 푸른 바다와 저 멀리 오가는 배들까지 완벽했다. 날씨와 시간과 장소의 합이 너무도 절묘해 한참을 서서 바라보았다.





작은 가게들을 구경하며 바닷길을 따라 산책했다. 소소하고 정겨운 느낌의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따스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보는 재미에 사는 재미까지 더해지면 더 즐거울 수도 있겠지만, 사는 건 조금 더 신중하기로 했으니 여러 번 생각하고 내려놓았다. 사고 버리는 재미가 덜할지는 몰라도 돈을 안 쓰는 게 아니라 다르게 쓰기로 하는 것이니 소비의 즐거움이 영 사라지는 건 아니다. 





"사용한 일회용 컵은 가까운 카페로 반납해 주세요."


뭐지. 하고 찾아보니 요즘 부산에서 활성화되고 있는 E컵이란다. 다회용 컵을 대여하고 반납하는 시스템인데 앱을 통해 보증금을 내고 E컵에 음료를 받으면 테이크아웃이 가능하고 다 마신 뒤 앱에 가입된 여러 카페 중 한곳에 가져다주면 되는 거라고.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이걸 한 번 체험해 봤으면 좋았을 걸 그랬네.





발걸음을 돌린 이유는 목적지가 따로 있었기 때문인데 바로 독립서점인 '손목서가'. 책을 출판하는 곳이기도 하고 팔기도 하는 책방이다. 아이를 갖기 이전의 나의 취향을 돌이켜보면 동네마다 온갖 독립서점을 구경하고 책을 사는 재미에 빠져있었다. 오랜만에 독립서점에 오니 몇 년 전 나로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커피를 주문하고 2층에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매일 와도 지겹지 않을 것 같았다. 몇 시간이고 앉아 좋을 것 같은 창밖 바다를 바라보았다. 햇살이 너무 세서 얼굴이 뜨거웠지만 무슨 오기인지 끝까지 이 자리를 고수하고 싶었다. 그렇게 책도 읽고 노트에 끄적이기도 하면서 몸을 녹였다.





한 시간 만에 카페를 나섰다. 아주 중요한 다음 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날씨 좋은 날 바다를 바라보며 적당히 살랑이는 바람을 맞으며 걷기로 했다. 꼭 걸어야만 했다.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가방 속에 꽁꽁 싸매 가져온 준비물을 꺼냈다.





짜잔. 집게와 생분해 봉투. 장갑은 귀찮아서 끼지 않았다. 고백하자면 난 이런 순간이 설렌다. 플로깅은 환경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기만족이 꽤나 큰 활동이다. 좋은 일을 한다는 보람은 접어두더라도 산책과 사색의 시간으로 들어간다는 점에서 육체와 정신과 환경이 만나는 최고의 활동이다.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 플로깅을 해보길 권한다.





스타트! 해안가 위쪽 언덕길을 걸으며 쓰레기를 찾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아랫길로 내려가지 않은 이유는 계단이 귀찮기도 했고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 쓰레기를 찾기 더 쉬울 것 같기 때문이었다. 바다는 멀리서 봐도 충분했다.





소소하게 담배꽁초를 주우며 걷고 있었는데,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쓰레기가 많이 보였다. 비닐봉지, 페트병, 휴지 등등 인간들의 온갖 흔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현장이었다. 의도한 것인지는 몰라도 각종 쓰레기를 담은 검은 봉지들도 군데 군데에서 발견되었다. 아마도 공원이나 해안가에 나와서 먹고 마시다가 그대로 묶어서 두고 간 것이 아닐까 추측게 하는 모양새였다. 정말 이래야만 하는 걸까.





쓰레기 무단투기 집중 단속 지역이라는 현수막이 무색하게 쓰레기는 도처에 널려있었다.





2km를 넘게 걸어 중리해변에 도착했다. 인적이 드문 해변이라 생각보다 깨끗했다. (역시 인간의 발길과 쓰레기의 양은 비례한다.) 빨간 등대와 크고 작은 돌들과 파도가 플로깅의 맛을 더해주었다.





조금 더 걸어 어선들이 일렬로 늘어선 작은 항구에 도착했다. 등대를 보면 그 앞까지 가주는 게 정석이지.





그런데 항구에 가까워지니 쓰레기가 급격하게 많이 보였다. 쓰레기 더미들이 해초에 뒤엉킨 채로 배에 가로막혀 먼바다로 나가지 못하고 둥둥 떠있는 건 다행이라 해야 할까 불행이라 해야 할까.





더 가관은 등대로 가는 길 입구쯤에 큰 바위들 사이사이에 가득한 쓰레기들이었다. 전부 무언가를 먹고 버린 플라스틱들이 분명했다. 누군가가 언제 어떻게 먹다가 버린 것들일까.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여러 누군가들의 무심한 쓰레기 투기 장면들을 상상해 보았다. 아무 곳도 아닌 곳이라고 생각해서 버린 걸까. 자연도 아니고 살아있지도 않은 아무것도 아닌 무쓸모의 공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소비와 쓰레기를 생산해 내는 시선이 바로 그것이 아닌지.





담배꽁초와 물티슈 다음으로 많았던 쓰레기 품목은 핫팩이었다. 춥다고 주머니에 쏙 넣어 손을 따뜻하게 녹였을 일회용품. 다 쓰고 난 뒤 철저하게 내동댕이쳐졌을 하얀 덩어리. 





항구 근처 폐어구 문제가 심각한 건 이제 놀랍지도 않은 일. 흔한 일. 혹시나 하면 역시나인 일.





부서진 유리병의 파편들은 이곳에 얼마나 오래 있었던 건지 파도에 마모되어 만져봐도 그 끝이 날카롭지 않았다. 소주병이었을까. 내가 어릴 땐 바닷가에서 조게 껍데기를 주워오곤 했는데 우리 아이는 유리 파편을 주워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아주 작은 생분해 봉투를 다 채웠다. 너무 작은 양의 미약한 환경 활동이지만, 이것의 가치를 알기에 잠시나마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낀다. 운동은 원래 해냈다는 성취감을 느끼는 게 기본이니까. 그래야 지속할 수 있으니까.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목적지인 해녀문화 전시관에 도착했다. 종량제 봉투가 아니라서 아무 곳에나 버릴 수 없고 아파트가 아니면 길에서 분리수거장을 만나기 쉽지 않아 전시관에 들어가 문의했고 다행히 직원분께서 대신 버려주신다고 하셨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쓰레기가 쓸려왔나 봐요."


주변에 쓰레기가 많다는 게 멋쩍으셨던 모양이다. 아니에요. 다 누군가가 버린 거예요. 





해안가에 버려진 유리로 공예품을 만드는 제주도 브랜드 '재주도 좋아'가 생각나서 주워왔다. 집에서 어떤 쓸모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정 없으면 화병 안에 돌들과 섞어 넣어서 쓰지 뭐. 나 혼자만의 플로깅을 기록할 기념품이다. 그래서인지 예뻐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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