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와 쓰레기
한 끗 차이다. 갖고 싶은 물건에서 처치 곤란 쓰레기가 되는 건. 어제는 없어서 못 사는 게 오늘 쓰레기통에서 발견되는 일이 놀라울 것도 없는 세상이다. 전 지구적인 일회용식 소비에 기업들도 동참하듯 비싼 전자제품조차 오래 쓸 수 없게 만들었다. 주기적으로 교체하도록 설계부터 조작된 걸 몇 십만 원씩이나 주고 사야 하는 이 불공평함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일명 배터리 게이트라고 하지. 물건을 아껴 쓰고자 하는 사람들 마저 어찌할 도리가 없이 속수무책으로 새것을 사게 만드는데 고급 인력의 기술력을 모두 쏟아부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 돌리지 못하고 계속 쓰는 나 자신을 탓해야 할까.
크기가 작고 홈이 많은 에어팟도 깨끗이 청소해 주면 오래 쓸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무신경하게 습관처럼 사용해왔는데 왜 여태 이걸 몰랐지. 잘 쓰지도 않던 면봉을 꺼내들어 구석구석 살살 잘 닦아주었다. 묵은 때들이 면봉 머리 부분 솜에 묻어 나왔다. 몰랐는데 정말 더러운 상태였구나. 진작 청소할 걸 그랬네.
깨끗해진 에어팟을 귀에 꽂으니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괜히 음악도 더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상쾌한 기분은 얼마 가지 못했다. 왼쪽 귀에서 연결이 끊어지는 듯한 툭 소리가 나더니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것이었다. 충전이 덜 됐나 싶어 케이스에 집어넣었다가 다시 꺼내기를 반복했다. 잘 안되다가 어느 순간엔 또 소리가 나오고 또 어떨 땐 안되고.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할 때쯤 기계는 완벽하게 생애 주기를 끝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풀 충전 후 5분이 지나지 않았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왼쪽 귀는 애초에 나오지도 않았고 오른쪽 귀는 30분을 채우기가 어려웠다. 이 작고 비싼 전자기기는 본래 자신의 기능을 완전하게 상실했다.
매우 불편했다.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영상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일상은 어마어마한 허전함으로 다가왔다. 길을 걸을 때, 버스 타고 이동할 때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는 건 꽤나 큰 불편함을 선사한다. 차 소리, 바람 소리,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 같은 일상 소음보다 이어폰 속 세상에 익숙해진지 오래다. 워크맨에 줄 있는 이어폰을 꽂아 듣던 시절부터 20년 넘게 이어져온 루틴은 단순한 생활 습관이나 취향을 넘어서는 익숙함이다.
사야 되나 고쳐서 써야 되나, 새것을 사야 하나 중고로 살까. 여러 가지 대안을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이즈가 작으니 새로 하나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전자제품을 쉽게 사고 버리는 것에 죄책감이 있는데 작으니 죄책감도 작아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혹시 몰라 A/S 센터에서 수리하는 비용을 알아봤다. 공식 센터에서 수리하면 9만 5천 원. 싸지 않은 금액이다. 애초에 애플은 고쳐서 오래 쓰도록 권장하지도 않고 그걸 바라지도 않는 기업이다. 고쳐서 쓰느니 새로 사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하는 금액의 적정선이 9만 5천 원이었을까.
소모품이라 중고를 구매하는 것도 미심쩍었다. 사서 얼마 지나지 않아 못쓰게 될 것 같다. 왜 이토록 비싼 전자제품이 이다지도 소모적이어야만 하는 걸까. 남편이 생일 선물로 새 에어팟을 사주겠다고 했다. 생각해 보겠다고 답했다.
손바닥 보다 작은 에어팟 하나 새로 들이는 게 망설여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 환경적인 이유가 있다. 환경스페셜 <아이를 위한 지구는 없다>에는 전 세계 충전식 배터리를 공급하기 위해 제대로 된 장비 하나 없이 코발트를 채굴하는 아이들이 등장한다. 불법 아동 노동과 독성 물질에 그대로 노출된 어린아이들의 모습은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 살고 있는 나의 손에 스마트폰과 에어팟이 들어오기까지 수많은 과정의 불편한 진실이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새 에어팟 생기면 난 얼마나 행복해할까. 물욕이 다시 차오를까. 그런 나 자신이 좋을까 싫을까. 그 에어팟은 또 얼마나 갈까.
또다시 당근마켓 앱을 기웃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