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용노동의 현장은 생각보다 다양한 장르의 일들이 있었다. 현장도 모두 다르게 생겼고, 현장에 오는 연령대와 사람들의 느낌도 정말 다 달랐다. 하는 일도 찾다 보면, 명절맞이 전 부치기, 대형 세탁 공장의 수건 개기, 쓰레기봉투 나눠주기, 약국 약 사진 찍기 등 보는 것만으로도 상상력을 마구 자극하는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내가 맛보았던 일용노동 중 가장 결이 다른 노동이라면 역시 고등학교 특강 보조교사 일이었다.
그날의 일은 시작부터 달랐다. 일단 며칠 전부터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기 때문에 경찰서에 의뢰하여 범죄 이력 조회를 해야 한다고 했다. 경찰을 우러러서는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았기에 이 것은 무사 통과했지만 뭔가 이 일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복장도 제약이 있었다. 먼지와 땀에 무방비로 노출되는일이어서 가장 낡은 옷을 입고 나갔어야 하는 기존 일과 다르게 깔끔한 단화에 정장이나 단정한 옷을 입고 오라는 안내 문자가 있었다. 그리고 준비물은 목장갑이나 마스크가 아닌 노트북! 점점 더 어떤 일인지 궁금해졌지만 직접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용직의 세계이기에 그날을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뭔가 달라도 많이 다른 일용직의 날
그리고 마침내 아이들을 만나는 날. 가장 깔끔해 보이는 원피스에 단화를 신고 노트북을 챙겼다. 나의 노동 파트너도 오늘은 봄날 같이 예쁜 병아리색 블라우스를 입고 나왔다. 우리 이런 모습 참으로 오랜 만인 거 같아 피식 웃음이 났다. 당을 채우기 위해 커피 우유를 들이켰던 다른 날과 다르게 노동 파트너가 챙겨 나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도시 여자들처럼 그녀의 차를 타고 학교로 향했다. 아이들의 반에 투입되기 전 임시로 마련된 교사들의 교실에 가보니 나처럼 많은 사람들이 어색한 듯 정장을 입고 앉아 있었다.
드디어 무슨 일인지 공개가 되는 순간이었다. 오늘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아이들이 받게 될 미래 직업 교육 관련 특강 강사를 도와 함께 수업에 참여하고 그날 아이들이 적어낸 문서를 새로운 보고서 형태로 만드는 일이었다. 나는 1학년 4반에 배정이 됐고, 목소리가 다정하고 웃는 모습이 선한 강사님과 한 조가 되었다. 5교시까지 진행되는 수업이라 아마도 시간 안에 보고서 작성은 힘들 것이니 잔업이 있을 수도 있다는 담당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도무지 들어도 감이 오지 않는 그 일이 뭘지 상상하며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 자료들을 챙겨 1학년 4반으로 향했다.
고등학교는 정말이지 너무나 오랜만이라 새롭기도 했고, 교실은 더욱더 오랜만이라 기분이 묘했다. 어느 반에나 있는 붙임성 좋은 아이들이 다가와 선생님~선생님 하며 오늘 뭘 하는지 묻고 나를 반갑게 맞아주자 긴장이 좀 풀렸다. 매 순간이 점수와 연결되는 요즘 아이들의 특성상 수업이 시작되자 아이들은 수업의 재미와 상관없이 매우 진지하게 임했고, 나는 1교시가 끝나는 순간부터 아이들이 적어 낸 보고서를 살펴가며 수업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졸 거면 그냥 자라고 이불을 깔아주고 싶던 아이들도 있었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누가 이 반의 모범생이고 누가 수업마다 잠을 자는 아인지 보고서만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록 극명하게 퀄리티의 차이를 보이는 아이들의 보고서를 보고 있자니 참으로 답답했다. 그날 보조교사의 임무에는 엎어져 자는 아이를 깨우되 너무 심하게 자면 그냥 두라는 가이드도 있는 걸 보면 고등학생 아이들은 초등학생 아들과는 또 다른 영역의 장벽이 존재함이 분명했다. 자고 있는 애를 흔들어 깨워 미래사회의 직업 세상으로 안내할 만큼 인류애가 넘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인연을 맺은 아이들의 미래가 달려있는 보고서를 아무렇게나 작성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순간 평소 경력을 살려 빛의 속도로 아이들의 소감들을 아름답게 포장하기 시작했다. '미래직업, 정말 재밌었다' 한 줄은 '직업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향후 더 많은 4차 산업혁명 시대 직업에 대해 탐구할 것을 표명함'이라고 적었다. '기업가 정신을 가져야겠다고다짐했다'는 '기업가로 성장하기 위한 다양한 자질 중 소통 능력과 리스크 관리에 대한 중요성을 인지하고 이 부분에 대한 자질을 함양하기로 다짐함'이라고 적었다. 발표를 한 번이라도 한 아이는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전달하고, 타인을 설득하는 리더의 자질이 충만한 아이가 되었고, 팀과제를 모아 가져온 아이는 함께 하는 프로젝트에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학생이 되어 있었다.
나도 내 손이 안 보여서 좀 놀랐던 신들린 타자의 향연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과장을 두세 스푼 넣어 배운 글질로 써 내려간 아이들의 꿈과 생각들
18년 간 카피라이터이자 작가로 살며 배운 도둑질이란 별 것 아닌 하나의 장점을 뚜렷하고, 강렬하며, 화려하게 포장하여 글로 표현하는 것이 전부인지라, 이 능력을 십분 살려 아이들의 모든 능력을 최선을 다해 빛나게 써주려 노력했다. 시간에 쫓기는 글쓰기 또한 평소 갈고닦아온 구력이 있는지라 어렵지 않게 빠른 속도로 25명 아이들의 보고서를 정리했다.
아이들과 급식도 함께 먹고, 까르르까르르 웃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디저트 삼아 휴식 시간도 함께 보냈다.
그동안 다녔던 그 어떤 현장보다도 따듯하고 평화로웠다. 대학 시절 과외를 했을 때 난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랑은 정말 거리가 먼 인품을 가졌구나 싶어 교육계는 멀리 해왔었는데, 선생님~선생님 하며 짐을 들어주고, 내게 말을 거는 아이들이 예뻐 보이는 것을 보니 나도 나이가 들었구나 싶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미래 직업에 대한 수업이 필요할까 싶게 이 아이들자체가 미래 직업에 대한 답이 될 것이라고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5교시의 특강이 모두 끝나고, 다시 모인 강사실에서는 여기저기서 못 쓴 보고서를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거의 모든 업무를 현장에서 끝낸 상태였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다른 현장보다 일찍 집에 귀가했다.
아... 이 것이 경력인가. 개나 소나 다 아는 한글, 우리말이라는 맹점 때문에 작업물에 한글만 읽으면 관계자 누구나 나타나 손을 대고 말을 보태 고쳐대는 탓에 늘 일의 전문성에 대한 의심을 하며 괴로워했던 나인데, 그래... 헛되이 보냈던 18년의 시간들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 다른 영역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용직의 세상에서 나의 경력과 닿아있는 일을 경력 탓에 편하게 했다고 생각하니 왠지 공으로 얻은 기회 같기도 했다.
역시나 헛된 시간은 없었고, 잡스 선생님의 컨넥티드 더 닷이 또 한 번 증명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