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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Oct 04. 2024

12. 한계를 인정하는 법

결혼 하기 몇 해 전, 회사에서 사귄 인생친구와 주말에 만나 백화점 문화센터로 그림을 배우러 다닌 적이 있다. 친구는 디자이너였기에 타고나길 미술쪽 금손이었고, 나는 내 분야가 아니라는 간만에 부담없는 마음과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황금같은 주말의 절반을 내어줄 수 있었다. 아주머니들이 회원의 대부분인 주말 백화점 문화센터는 중년의 남자 화가분이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예술가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말이 많고, 매 시간마다 수강생들의 돈을 걷어 김밥을 사오게끔 하셔서 큰 존경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모처럼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사실에 토요일이 기다려졌다. 연필소묘로 사람 그리는 법을 배우던 어느 날 친구는 지금껏 배웠던 데로 빠르고 멋지게 눈 그리기를 성공했다. 아직 형태를 잡는데 급급했던 나는 멋지게 완성한 친구의 그림을 보며 조비심이 났고 거친 선으로 속도를 냈다. 허허실실 하던 선생님은 급 도인처럼 나를 꿰뚫어 본듯 보며 친구한테 샘이 나서 대충대충 마무리 한게 아니냐며 농인 듯 농이 아닌 진실을 건냈고, 정곡을 찔린 나는 단전부터 부끄러움이 느껴져 그 달을 마지막으로 수업을 나가지 않았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또 시작된 조바심과 안달 


그 후로 15년의 시간이 지났다. 많이 성숙되었다 믿었고, 최근에 물류센터로 도를 닦으러 다닌 나는 조금은 나를 다스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나의 노동 파트너와 화장품 물류센터를 갔던 날의 일이다. 신입으로 갔던 우리에게 작업대 하나씩이 주어졌고 우리는 그 날도 하나의 부품처럼 혼자만의 싸움을 해야했다. 그런데 그 날은 뭔가 달랐다. 나의 노동파트너가 어딘가로 계속해서 장소를 옮겨가며 업무를 바꿔하고 있었다. 점심 때가 되어서야 그 사정을 알 수가 있었는데 손이 빠른 그녀의 재능을 인정받아 작업 반장에게 뽑혀 나가 바코드 업무를 새로 배우기도 하고, 빠르게 처리해야할 물품 포장 현장에 투입되기도 했다고 했다. 평소 나의 노동파트너의 집에 갑작스레 방문했을 때를 생각해보면 놀랄만한 일도 아니었다. 마치 내일 귀빈이라도 방문하는 듯 언제 방문하여도 오와 열을 맞춰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물건들하며 먼지 하나 없는 집안의 상태들은 평소 깔끔하고 정리정돈에 특화된 그녀의 성격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아주 작은 일도 엑셀로 플랜하고, 빠르고 깔끔하게 정리를 해두는 파워 J의 면모를 뿜어내던 그녀의 성향은 손빠르게 정리 정돈을 해내야 하는 물류현장에서 빛이 났다. 


무질서 속의 질서를 갖고 있는 대문자 100% P형 인간이 나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가. 나는 평소 머릿속에 그리드라고는 한 줄도 없는 완벽한 P형 인간이었다. 즉흥적이고, 정리정돈은 나만의 기준이 있을 뿐 크게 불편하지 않으면 그 자리 그대로 놓이는 곳이 그 물건의 자리가 되는 인간이었다. 평소 정리 정돈에 특화된 남편과 함께 사는 덕분에 얼마 있지 않던 정리 정돈의 유전자는 점점 더 퇴화되어 사라져갔고, 나는 정말이지 완벽하게 대문자 100% P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제자리에 메뉴얼대로가 쉽지 않은 나는 특별히 사고를 치지 않을 뿐 물류현장에서 특별한 인재는 될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또 몹쓸 승부욕에 뼛속까지 주목 받아야하는 모범생이었다. 같이 간 노동파트너가 주목을 받으니 뭔지 모를 조바심이 났다. 거친 선으로 눈을 그려내던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가 나는 또 나를 다그치고 있었다. 무리하게 속도를 내 포장을 했고, 나의 페이스를 잃었다. 항공편에 싣어야 하는 물건이기에 너무 꽉 채워 포장을 하면 기내에서 부풀어 터질 수 있으니 주의 해달라는 주의 사항을 들었지만 서둘러 포장을 하다보니 자꾸만 박스

위 쪽이 뚱뚱하게 부풀었다. 


자꾸만 욕심을 내며 나를 몰아가던 순간 정신이 버쩍 들었다. 아... 내가 또 이렇듯 나의 한계를 시험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욕심을 내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과 잘 해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구분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나는 모든 일에서 잘 해내고 싶어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자아를 찾겠다며 야심차게 떠났던 그 길에서도 말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 흘려낸 땀이 적지 않았음에도 오늘은 홀가분하지가 않았다. 매 순간 욕심을 내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게 가장 힘들고 뼈 아픈 일, 나의 한계를 인정하는 일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바꾸지 못하는 한계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한계를 인정하는 일이란 늘 뼈 아프고 힘이 든다. 내가 잘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완전히 부정되고, 남들보다 앞서지 못하는 그 하나에 꽂혀 그 것만을 반복하여 생각하고 있는 내가 참으로 버거웠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15년 전과 달라지지 않은 나의 모습에 한 동안 기분이 한 없이 가라앉았다. 


나의 한계를 인정하는 법을 아무리 속성으로 배우고 깨우쳐도 지키기 힘든 나이겠지만 그래도 위로 받고 싶었던 나는 평소 애정하는 유투브 밀라논나 채널에서 소개 된 기도문을 찾아 쓰고 소리내어 읽었다. 

초조해하지 않고, 애태우지 않고, 괴로워하지 않고, 아쉬워하지 않고, 안달내지 않으며 한계를 인정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어느 수녀님의 기도문 중 


기대한만큼 채워지지 않는다고 초조해하지 마세요.

믿음과 희망을 갖고 최선을 다한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더 사랑하지 못한다고 애태우지 마세요.

마음을 다해 사랑한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누군가를 완전히 용서하지 못한다고 괴로워하지 마세요.

날마다 마음을 비우면서 괴로워한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빨리 달리지 못한다고 내 발을 아쉬워하지 마세요.

내모습 그대로 최선을 다해 걷는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 입니다. 


세상의 모든 꽃과 잎은 더 아름답게 피지 못한다고 안달하지 않습니다.

자기 아름다움으로 피어난 거기까지가 꽃의 한계이고 

그것이 최상의 아름다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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