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라이터의 삶을 살며, 지갑을 여는 사람의 취향에 맞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뜯고 찢고 말아먹고 바꾸던 글들에 환멸을 느꼈던 순간이 있었다. 그 때 쓴 일기를 보면 앞으로는 나의 글들이 누군가의 일방적인 취향에 갇히지 않도록 내가 온전히 나의 글을 쓸 수 있도록 지켜주겠노라하는 비장한 의지가 담겨있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그 순간부터 회사를 다니는 시간을 빼고 모든 시간에 기획서 작업, 영상구성, 외부의 카피 의뢰 등 일이 들어오는 모든 것을 쳐내지 않고 닥치는 대로 받아 하기 시작했다. 퇴근도 없었고, 주말도 없었다. 데이트 약속도 자주 미뤄졌고, 미팅이 잡히면 연애도 뒷전이었던 것 같다. 회사에 노트북을 들고 다니며 퇴근 후에는 스타벅스에 앉아 일을 하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기 위한 공부도 시작했다. 어느 덧 외부의 일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월급을 넘어섰고, 나는 비로소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골라하며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겠다는 판단으로 프리랜서로 독립했다. 내가 나의 꿈을 지킬 수 있는 무기가 생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 나의 계획을 철저히 따라주지 않았다. 나는 결혼과 출산 앞에서 일을 놓지 않기 위해 비장했던 다짐이 무색하게 또 쓰고 싶지 않은 글을 쓰고, 광고주의 입맛에 맞는 글을 쓰기 위해 모진 수모와 수정을 참아내야 했다.
그때마다 나는 김영하 작가와 고갱을 떠올렸다. 김영하 작가는 작가의 꿈을 지켜주기 위해 꽤나 오랜 시간 번역가의 삶을 살았었고, 고갱은 그림을 그리며 파리의 증권 중개인으로 큰 돈을 벌며 자신의 꿈을 지켰다. 결국 어른의 꿈이란 것은 마냥 설레고 열정만 넘쳐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의 꿈이란 내 꿈이 허황된 꿈으로 끝나지 않게 꿈이 현실이 될 때까지 지킬 수 있는 돈과 힘이 있어야 한다. 내 꿈을 지키고 내꿈을 이뤄가는 시간을 벌기 위해 내 스스로 버는 돈이 가장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꿈을 지키겠다고 무책임하게 자신의 생계조차 이어가지 못하거나, 누군가의 삶을 희생하게 한다면 나는 그 꿈은 꿈이 아니라 나의 삶을 갉아 먹는 망상이라고 생각했다.
이렇듯 비장한 결심으로 꿈을 지켜왔지만, 출산 앞에선 답이 없었다. 아이를 낳고, 일이 점점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육아독립군이었던 나는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 미팅을 참여하기 힘들었고, 부족한 잠에 열과 성을 다하지 못했던 결과물들은 많은 거래처를 잃게 했다. 나의 젊음을 갈아 넣어야 하는 나의 가장 소중한 창작물 앞에서 다른 선택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점점 꿈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나만의 글을 지켜주겠다는 말을 지키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도 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은 이번 여름 일용직 노동현장을 다니며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나에게 꿈을 지키기 위해 온전히 나의 몸을 움직여 오늘 나의 하루를 책임질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주 작은 힘만 내면 나는 앞으로 조금 더 오랫동안 쓰는 사람의 삶을 살아갈 수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의 꿈을 지키기 위해 남편의 월급을 쪼개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손을 벌리지 않아도 나는 나 하나의 인생과 꿈 아니 나의 하루 정도는 온전히 책임질 수 있는 어른이라는 사실이 노동 현장에서 깊이 느껴졌다.
새로운 길을 찾고 있는 노동파트너에게도 정말 필요했던 것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던 것 같다. 그녀 스스로 몸을 움직여 자신의 하루를 지켜가는 것을 보며 나는 앞으로 그녀가 어떤 꿈을 꾸던 자신의 꿈이 자리 잡을 때까지 자신의 꿈을 지켜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거창하고 화려한 일을 하지 않아도 그 과정이 폼나고 그럴싸해보이지 않아도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책임을 다하는 어른의 삶은 참으로 빛이 난다. 마음 깊숙하게 울림을 준다.
노동현장에서 흘렸던 땀과 그 땀으로 벌었던 하루만큼의 돈과 시간은 앞으로 나와 나의 노동파트너가 살며
꾸는 모든 꿈들을 지켜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다.